[정의]
점심밥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그릇 또는 점심밥의 통칭.
[내용]
도시락은 이와 같이 그릇을 일컫는 말과 집을 떠나서 일하러 가거나 여행·소풍 등에 휴대하기 쉽게 도시락에 반찬을 곁들여 담은 밥을 일컬어서 혼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집에서 밖에 나간 사람에게 음식을 날라갈 때는 공고상(公故床 : 운반하기 쉽게 머리에 이고 양측면의 손잡이구멍을 붙잡고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상)에 음식을 차려 머리에 이고 날라다주었다. 그 뒤 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겨 밖에서 식사해야 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사기나 나무로 둥글거나 네모나게 여러 층으로 만든 찬합에 반찬·밥·술안주 등을 담아서 나르거나 휴대하게 되었다. 그 뒤 더 간단하게 발달한 것이 도시락으로, 처음은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로 길고 둥글게 엮은 작은 고리짝을 사용하였다. 또, 엷은 나무로 상자처럼 만들어 밥을 담기도 하였다. 반찬은 국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반찬으로 보통 간을 짜게 하여 만들었다. 도시락을 이용하는 층은 주로 학생과 직장인들이다. 도시락은 하루 세끼의 식사 중 한끼에 해당되므로 하루에 필요한 열량과 영양소의 3분의 1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밥의 양과 반찬의 양을 같도록 하고, 반찬은 싱겁게 다섯가지 기초식품이 골고루 담겨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요즈음 도시락 용기가 다양해져서 알루미늄이나 알루마이트·플라스틱제품의 다양한 형태로 시판되고 있다.
1879
백자발(白磁鉢)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발(鉢)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5409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순백자는 아무 문양도 없는 순백의 백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음각문양의 백자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되면서 가장 많고 12세기에는 양각, 반양각과 투각, 상형기법 등의 백자가 발전하여 전북 부안의 유천리 가마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백자보다 청자의 생산이 압도적이었으며, 경질백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여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으로 그중에도 순백자가 대부분이다. 이 백자발은 구연(口緣)은 외반되었고, 외측면선(外側面線)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좁아 들어 굽과 만난다. 내면(內面)에는 내저원(內底圓)이 있고, 내외면(內外面) 모두 소문(素文)으로 물레 성형 자국이 남아있다.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굽주위를 제외한 전면에 시유되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 안쪽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내저면(內底面)에 모래를 받치고 포개 구은 흔적이 남아있다.
1878
백자대접(白磁大楪)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대접(대접)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5408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순백자는 아무 문양도 없는 순백의 백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음각문양의 백자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되면서 가장 많고 12세기에는 양각, 반양각과 투각, 상형기법 등의 백자가 발전하여 전북 부안의 유천리 가마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백자보다 청자의 생산이 압도적이었으며, 경질백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여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으로 그중에도 순백자가 대부분이다. 이 백자대접은 구연(口緣)은 외반되었고, 외측면선(外側面線)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좁아 들어 굽과 만난다. 내면(內面)에는 내저원(內底圓)이 있고, 내외면(內外面) 모두 소문(素文)으로 물레 성형 자국이 남아있다.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굽주위를 제외한 전면에 시유되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내저면(內底面)에 모래를 받치고 포개 구은 흔적이 남아있다.
1877
미투리
한국(韓國)
초제(草製)
용도기능
의(衣) 신발(신발) 혜/리(鞋/履) 미투리(미투리)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407 / 000
상세설명
[정의]
삼·노 따위로 삼은 신.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여섯 날 내지 여덟 날에 총을 50∼60개 세워 바닥이나 총이 아주 정교하고 날씬한 형태이다. 마혜(麻鞋) 또는 마구(麻辜)라고도 하며, 재료로는 삼·왕골·청올치·백지·면사·견사 등이 사용되었다. 미투리는 재료나 만듦새에 따라 삼신·왕골신·청올치신·무리바닥·지총미투리 등으로 불렸다. 지총미투리는 종이를 꼬아서 총을 만든 것이고 무리바닥은 여덟 날로 만들고 바닥에 쌀가루를 먹여 만든[八經粉塗] 정제품이었다. 만든 곳에 따라 절에서 만들어 파는 것은 절치, 탑골의 장인들이 만든 것은 탑골치라 부르기도 하였다. 미투리는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에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종이미투리와 미혼남녀의 장식신인 꽃미투리도 있었다.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에서는 왕골신이나 망혜(芒鞋)는 가난한 사람의 신이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미투리도 신분에 따라 그 재료나 구조가 달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투리는 조선시대 서민층 상류계급에서 신었던 대표적인 신이라 하겠다.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긴목항아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가까지 계속 사용된다. 특히 신라와 가야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신라의 것은 어깨목이 각을 이루며 바닥에 대(臺)가 달리는 경우가 많고 동체(胴體)에 기하학적 무늬가 있고 토우(土偶)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伽耶)의 것은 어깨와 목이 곡선으로 이어지며, 대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굽받침이나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진다. 무늬는 물결무늬(波狀文)가 주류를 이룬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어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도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