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후기(後期)에 영남지역 전역에 걸쳐서 출토되고 있는 '신식와질토기(新式瓦質土器)'의 표지적(標識的)인 기종(器種)으로, 받침(臺)이 부착(附着)되어 있으며, 아가리(口緣) 부분이 유난히 벌어져서 '대구광구호(臺附廣口壺)'라고 불리기도 한다.
[발달과정/역사]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후기(後期)에 영남지역 전역에 걸쳐서 출토되고 있는 '신식와질토기(新式瓦質土器)'의 표지적(標識的)인 기종(器種)으로, 받침(臺)이 부착(附着)되어 있으며, 아가리(口緣) 부분이 유난히 벌어져서 '대구광구호(臺附廣口壺)'라고 불리기도 한다. 굽다리긴목항아리의 조형(祖形)으로는 원삼국시대 중기에 표지적으로 출토되는 '고식와질토기(古式瓦質土器)' 기종인 쇠뿔손잡이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가 점차 받침이 붙게 되거나 그릇받침(器臺)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예는 김해 대성동 유적 주변 제1지구 13호묘 출토품과 영남지방 출토로 전하는 호림박물관 수장품을 들 수 있다. 굽다리긴목항아리는 울산 하대 유적 출토품이 가장 빠른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하대 43호묘와 44호 묘의 출토품을 들 수 있는데, 44호묘에서는 쇠뿔손잡이항아리와 동반출토되어 어느 정도 빠른 시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굽다리긴목항아리는 굽다리 입곧은항아리(臺附直口壺)와 동반출토된 예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굽다리목곧은항아리로 교체되며서 소멸된 듯하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후기(後期)에 영남지역 전역에 걸쳐서 출토되고 있는 '신식와질토기(新式瓦質土器)'의 표지적(標識的)인 기종(器種)으로, 받침(臺)이 부착(附着)되어 있으며, 아가리(口緣) 부분이 유난히 벌어져서 '대구광구호(臺附廣口壺)'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체적인 기형(器形)을 입술과 목부(口頸部), 몸체부(胴體部), 다리(臺附)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목부분은 약간 벌어지면서 올라오다가 입술끝(口緣端)에 이르러 급하게 밖으로 벌어지며, 몸체는 역삼각형(逆三角形)·장동형(長胴形)·편구형(扁球形)의 모양을 이루고 있고, 다리는 나팔상(喇叭狀)으로 벌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접시형 뚜껑(蓋)와 세트를 이루며 출토되는 예가 많다.
1854
당초문암막새(唐草文平瓦當)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암막새(암막새)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5383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이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암막새는 암키와로 형성된 기왓골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를 말한다. 삼국통일 이후 유행하였으며, 수막새와 마찬가지고 그 시대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당초문(唐草文)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보상화문(寶相華文)을 비롯한 각종 동식물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양은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초문 등의 덩굴문양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 당초문암막새는 원주 법천리 법천사지(法泉寺址)에서 출토된 당초문암막새이다. 상·하로 좁은 테두리(周緣)가 있고, 막새면에 당초무늬(唐草文)가 좌우대칭으로 새겨졌다. 테두리에는 작은 구슬무늬(連珠文)가 둘러져 있다. 결실상태가 심하다.
1853
민무늬토기항아리(無文土器壺)
한국(韓國)
토제(土製) 연질(軟質)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5382 / 000
상세설명
[정의]
청동기시대의 무늬가 없는 토기로 일명 '무문토기(無文土器)'·'무늬없는 토기'라고도 한다. 신석기시대 널리 사용되었던 무늬가 있는 토기인 빗살무늬토기에 상대되는 말로 사용된다.
[발달과정/역사]
한국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일괄해서 일반적으로 '민무늬토기'하고 하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는 물론 간토기(磨硏土器)와도 구분하였던 용어이다. 이러한 개념을 충실히 따라서 북한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갈색민그릇과 간그릇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마연(磨硏)이나 채색(彩色) 등의 표면처리 수법에 관계없이 통틀어 민무늬토기라고 한다. 민무늬토기란 문자 그대로라면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토기 중 지역에 따라서는 평북 신암리토기(新岩里土器)를 비롯하여 무늬가 장식된 예가 많다. 또한 시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한에서 실제 사용한 예를 보면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B.C. 1세기경 한대(漢代)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때도 여전히 민무늬토기가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남한의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 전기에 타날무늬토기(打捺文土器)와 공반하는 무늬없는 토기, 예를 들어 한강유역의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를 민무늬토기로 보기도 하이 경우 민무늬토기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된 것으로 시대적 의미가 약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 나아가서 민무늬토기를 시대의 표지유물(標識遺物)로 보아 청동기시대를 대신하여 사용하는 '민무늬토기시대'라는 개념은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 사용기에 두루 걸쳐 지나치게 포괄하는 시대개념(時代槪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아울러 남한지방 위주의 지역적 시대개념이라는 한계가 있어 한국고고학의 범위를 남한에 한정하는 결과를 낳게 됨을 유의하여야 한다. 토기는 집단마다 즐겨 쓰는 그릇모양과 무늬장식이 다르므로, 토기장식 등의 구성요소를 살펴서 집단의 지리적인 활동범위나 그 전파과정(傳播過程)을 추적할 수 있다. 아울러 각기 다른 형식의 속성이나 기종이 복합된 토기를 통해 서로 다른 집단의 문화적 결합을 밝힐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토기 형식의 분류와 분석은 그 일차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데, 형식 이름은 대체로 출토되는 지명을 따거나 특징적인 형태를 근거로 명명한다. 한반도 민무늬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지역별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공통된 변천과정(變遷過程)을 기준한 시기구분이 곤란하다. 일반적으로 요하(遼河)와 북한지방에서는 신석기시대 토기에서부터 점진적인 이행과정을 거쳐 민무늬토기로 발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남한지방에서는 같은 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와는 형식상 서로 연결되지 않는 단절된 교체양상(交替樣相)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남한에서 통용되는 민무늬토기의 전·후기 시기구분이 한반도 전역의 청동기·철기시대의 토기변천과 맞물리는 것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일반적으로 용도상에서 오는 제작의 차이에 의해 발형·심발형(深鉢形)·완형(燔形)·명형(皿形)·옹형(甕形)·호형(壺形)·두형(豆形) 등으로 구분된다. 이 토기들은 지역·시기·제작수법에 따라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역이나 시기에 따른 독특한 유형의 토기 중 대표적인 유적명을 따서 명명되어 불리는 토기로는 신암리식 토기·공귀리식 토기·미송리식(美松里式) 토기·
1852
식초병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기타(其他)
용도기능
식(食) 가공(加工) 가공(加工) 기타(其他)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285 / 000
상세설명
[정의]
고유의 향 조미료인 식초를 제조하고 보관하는데 쓰이는 용기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동체(胴體)는 중두리 중간 정도의 크기로 항아리 모양을 닮았으며 어깨부분이 급격히 좁아지고 비교적 긴 목(頸部)과 입(口緣)을 이루고 있다. 동체의 배 부위에는 새끼 손가락 만한 주구(注口) 하나를 만들어 붙였는데 재료를 넣고 빼는 위쪽의 큰 주구에 비추어 이 작은 새끼 주구는 완숙된 식초를 부어서 쓰는데 사용하였다. 술 지게미나 맛이 변한 술을 넣고 나무나 짚으로 주둥이를 막은 뒤 부뚜막의 한켠에 놓았다가 발효시켜 사용하였다. 초가 변질되려고 할 경우에는 '예(禮)를 맞춘다'고 하여 누룩 3덩이, 밥 3숟가락, 불 붙은 깜부기숯 3개를 촛병 안에 넣기도 하였다.
1851
고비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가구(家具) 고비(考備)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282 / 000
상세설명
[정의]
방이나 마루의 벽에 걸어놓고 편지나 간단한 종이말이 같은 것을 꽂아두는 실내용 세간.
[내용]
조선 후기의 ≪재물보(才物譜)≫에서는 고비를 서팔(書隘)이라 하고, 따로 지와자(紙窩子)는 '고삭고비'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그 말뜻은 종이고비의 형태와 상당히 부합되는 바 있다. 유지(油紙)로 된 빗접을 접어서 넣어두는 벽면시설을 '빗접고비'라 하고, 또 절첩자(折疊子)를 '접고비'라 약칭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의 저서인 ≪산림경제≫에서는 서재용품을 열거하는 가운데 죽고비(竹高飛)를 들었는데, 이미 이 시대에 선비의 서재용품으로 정착하여 있었음이 확실하다. 물론, 여기서 제시한 고비가 죽제품으로 못박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벽에 걸어놓고 편지나 두루말이를 꽂아두는 특별한 문방구여서 내용을 파악하기 쉬우면서 선 처리의 쾌적한 볼품이 감안된 것으로 풀이된다. 현존하는 죽고비의 유물은 대체로 대형에 속하는 편이다. 목제의 고비는 일정한 규격품이 없지만, 대개 오동나무 판재로 짠 것이 많고 호화롭게 칠을 하지 않는 대신 앞판에다 음각하여 무늬를 새긴 것이 예사이다. 혹은 앞판을 대마디 모양의 가는 나무살로 댄 예도 있다. 그러나 여성용의 고비는 채색으로 무늬를 그리거나 색지를 오려 붙여서 치레한 것도 있다. 고비는 중국·일본의 가구에서 볼 수 없는 우리 나라의 독특한 유형으로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평좌식 주거공간에 적합하게 발달된 것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가벼운 판자나 대나무 등으로 만드는데 상하가 길게 내리 걸도록 되었다. 등판과 앞판 사이를 6∼9㎝쯤 떼어 2∼3단 가로질러 놓음으로써 개방적으로 비치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더 소박한 형태의 것은 두꺼운 종이로 주머니나 상자모양으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종이띠를 멜빵 모양이나 X자형으로 벽에 직접 부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고비의 어원이 어디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더러 고비(考備, 高飛) 등 한자로 표기하는 예가 있으나, 이는 취음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