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숯불을 담아놓는 그릇.
[개념]
오지·무쇠·놋쇠·곱돌 따위로 만들며 형태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쓰임에 따라 불씨 보존 및 보온을 위한 것, 차를 달이는 것, 난방을 위한 것, 여행 때 가마 안에서 쓰던 수로(手爐) 따위로 나눌 수 있으나 몇 가지 구실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화로는 본디 화덕에서 비롯되었으며 등듸나 화투 또는 봉덕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기구이다.
[역사]
함경도 지방의 등듸는 선사시대의 화덕이 변형, 발전된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화덕은 집자리 가운데 땅을 오목하게 파고 주위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들을 둘러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철기시대의 것은 그 테두리를 진흙으로 둘러놓아, 등듸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등듸는 정주간에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한 끝에 진흙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높이 20㎝, 긴지름 60㎝, 짧은지름 40㎝의 타원형) 땅바닥에 있던 화덕이 방 한 끝에 설치되는 첫 단계의 것이다. 이곳에 아궁이의 불을 떠 옮겨 묻어서 불씨를 보존하며 관솔 따위를 지펴서 조명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우등불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싸리로 우산처럼 엮은 어리(개성에서는 '기태', 함경도에서는 '어룽태'라고 한다.)를 얹고 그 위에 젖은 옷이나 관솔 따위를 올려놓아 말리기도 한다. 제주도의 봉덕은 마루 한복판에(이것이 없는 집에서는 흙바닥에) 박아놓은 가로 50㎝, 세로 30㎝, 깊이 15㎝, 두께 5㎝쯤 되는 네모꼴의 돌이다. 이곳에 불을 지펴서 간단한 음식을 끓였으며 관솔불을 피워서 집안을 밝히기도 한다. 또, 추운 때에는 이 주위에서 잠을 잔다. 따라서, 봉덕은 일본의 이로리와 기능이 같은 셈이나 규모가 작고 주위에 앉을 사람의 자리가 정해져 있거나 하는 따위의 까다로운 제한이 없을 뿐이다. 강원도의 화투는 부뚜막 한쪽에 진흙을 이겨서 화로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높이 70∼80㎝). 위에는 솥을 걸 수 있도록 우묵한 자리를 내고 이와 별도로 아래쪽에 한 변의 길이가 20㎝쯤 되는 네모꼴의 구멍을 내었다. 위·아래 사이는 막혔으며 윗구멍에 불을 담아서 음식을 데우거나 집안도 밝힌다. 아랫구멍에는 불씨를 묻는다.
[화로의 용도 및 특징]
예전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집에 따라서는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었으며,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그 집의 맏아들이 이사하는 새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거나 향교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에 붙이는 불은 특정한 집에서 옮겨다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붙박이 시설들이 들어 옮길 수 있는 화로로 발전하자 그 용도는 매우 많아졌다. 아궁이의 대용은 물론이고 겨울철에는 빼놓을 수 없는 난방구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만큼 상하 계층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그리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두루 쓰이는 살림살이는 드물다. 농가에서 흔히 쓰던 질화로는 자배기를 닮아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졌으며 좌우 양쪽에 손잡이가 있으나 받침은 달리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무쇠화로의 형태는 질화로와 비슷하나 손잡이가 밖으로 돌출되고 바닥에 발이 셋 달린다. 상류층에서 많이 쓴 놋쇠화로에는 비교적 너른 전이 달리고(전화로라고도 부른다.) 다리의 윗부분은 개다리처럼 앞으로 조금 돌출된 특징을 지닌다. 돌화로는 흔히 네모꼴을 이루며 둥근 쇠를
1844
화로(火爐)
한국(韓國)
금속(金屬) 철제(鐵製)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난방구(煖房具) 화로(火爐)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221 / 000
상세설명
[정의]
숯불을 담아놓는 그릇.
[개념]
오지·무쇠·놋쇠·곱돌 따위로 만들며 형태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쓰임에 따라 불씨 보존 및 보온을 위한 것, 차를 달이는 것, 난방을 위한 것, 여행 때 가마 안에서 쓰던 수로(手爐) 따위로 나눌 수 있으나 몇 가지 구실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화로는 본디 화덕에서 비롯되었으며 등듸나 화투 또는 봉덕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기구이다.
[역사]
함경도 지방의 등듸는 선사시대의 화덕이 변형, 발전된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화덕은 집자리 가운데 땅을 오목하게 파고 주위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들을 둘러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철기시대의 것은 그 테두리를 진흙으로 둘러놓아, 등듸가 이 시기에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 등듸는 정주간에서 부엌으로 내려가는 한 끝에 진흙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높이 20㎝, 긴지름 60㎝, 짧은지름 40㎝의 타원형) 땅바닥에 있던 화덕이 방 한 끝에 설치되는 첫 단계의 것이다. 이곳에 아궁이의 불을 떠 옮겨 묻어서 불씨를 보존하며 관솔 따위를 지펴서 조명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우등불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싸리로 우산처럼 엮은 어리(개성에서는 '기태', 함경도에서는 '어룽태'라고 한다.)를 얹고 그 위에 젖은 옷이나 관솔 따위를 올려놓아 말리기도 한다. 제주도의 봉덕은 마루 한복판에(이것이 없는 집에서는 흙바닥에) 박아놓은 가로 50㎝, 세로 30㎝, 깊이 15㎝, 두께 5㎝쯤 되는 네모꼴의 돌이다. 이곳에 불을 지펴서 간단한 음식을 끓였으며 관솔불을 피워서 집안을 밝히기도 한다. 또, 추운 때에는 이 주위에서 잠을 잔다. 따라서, 봉덕은 일본의 이로리와 기능이 같은 셈이나 규모가 작고 주위에 앉을 사람의 자리가 정해져 있거나 하는 따위의 까다로운 제한이 없을 뿐이다. 강원도의 화투는 부뚜막 한쪽에 진흙을 이겨서 화로 모양으로 쌓은 것이다(높이 70∼80㎝). 위에는 솥을 걸 수 있도록 우묵한 자리를 내고 이와 별도로 아래쪽에 한 변의 길이가 20㎝쯤 되는 네모꼴의 구멍을 내었다. 위·아래 사이는 막혔으며 윗구멍에 불을 담아서 음식을 데우거나 집안도 밝힌다. 아랫구멍에는 불씨를 묻는다.
[화로의 용도 및 특징]
예전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집에 따라서는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었으며,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그 집의 맏아들이 이사하는 새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거나 향교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에 붙이는 불은 특정한 집에서 옮겨다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붙박이 시설들이 들어 옮길 수 있는 화로로 발전하자 그 용도는 매우 많아졌다. 아궁이의 대용은 물론이고 겨울철에는 빼놓을 수 없는 난방구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만큼 상하 계층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그리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두루 쓰이는 살림살이는 드물다. 농가에서 흔히 쓰던 질화로는 자배기를 닮아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졌으며 좌우 양쪽에 손잡이가 있으나 받침은 달리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무쇠화로의 형태는 질화로와 비슷하나 손잡이가 밖으로 돌출되고 바닥에 발이 셋 달린다. 상류층에서 많이 쓴 놋쇠화로에는 비교적 너른 전이 달리고(전화로라고도 부른다.) 다리의 윗부분은 개다리처럼 앞으로 조금 돌출된 특징을 지닌다. 돌화로는 흔히 네모꼴을 이루며 둥근 쇠를
1843
백자청화초문호(白磁靑畵草文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항아리(항아리)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5192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항아리는 외반(外反)하는 구연(口緣)에 짧은 목(頸部), 어깨(肩部)에서부터 벌어져 동체(胴體) 상부(上部)에서 최대로 벌어졌다 서서히 좁아져 내려가다 동체 하부(下部)에서 각을 이루며 좁아져 세워진 항아리이다. 청화안료(靑華顔料)를 사용하여 어깨부분의 두 곳에 초문(草文)을 시문하였다. 유색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시유상태가 고르지 못하여 부분적으로 노태(露胎)되어 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 바닥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구연의 일부가 수리되었다.
1842
백자청화초문호(白磁靑畵草文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항아리(항아리)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5191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항아리는 약간 외반하는 구연에 둥근 동체를 지닌 항아리로 구연 상․하단에 2조 1조의 횡선(橫線)을 두르고 어깨에 2조의 횡선(橫線)을 둘렀다. 어깨부분에 추상화 된 초문(草文)을 청화안료(靑華顔料)를 사용하여 간략하게 시문하였다. 유색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로 전면에 시유되었다.
1841
백자청화초문항아리(白磁靑畵草文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항아리(항아리)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5190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 이 백자항아리는 구연부(口緣部)는 외반되었으며 그 끝이 밖으로 말렸있다. 동체(胴體)는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최대경을 이룬 뒤 좁아들어 굽과 만나는 외측면선(外側面線)을 보이는 항아리(壺)이다. 구연부(口緣部)는 외측면(外側面)의 구연(口緣) 바로아래 1조의 선대를 돌리고, 그 아래 추상화된 초문(草文)을 시문하였다. 어깨(肩部)와 동체(胴體)의 중앙에 추상화된 초문(草文)을 시문하였다. 유(釉)는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를 시유하였고, 굽은 다리굽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