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삼국시대에 유행한 제사용 그릇으로 다리가 붙은 토기를 말하지만 주로 신라, 가야지역의 두형(豆形)토기를 칭한다.
[발달과정/역사]
굽다리접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선사시대 및 고대 용기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중국식 명칭으로는 '두(豆)'라고 하는데 주례(周禮)를 참조하면 나물 혹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며 제기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굽다리접시가 한 시기의 토기유물군 중에 주된 기종(器種)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초기철기시대부터이다. 무문토기 전기까지 올라가는 굽다리접시 중에는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만 발견되는 편이고 무문토기 중기까지도 주된 기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철기시대 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단계부터는 굽다리 접시가 점차 주기종(主器種)으로 정착하게 된다. 굽다리점시라는 기종이 가장 많이 제작되고 장기간 다양하게 발전한 지역은 신라와 가야지역이며,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보통 고고학자가 토기편년을 할 때에 형식편년의 지준으로 굽다리접시를 선택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굽다리접시의 기본형태를 보면 낮은 접시나 깊은 완(盌), 혹은 바리(鉢)와 같은 배신(杯身)에 원통형(圓筒形) 또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의 다리(臺脚)가 결합된 모습인데 다리를 장식하거나 아니면 그릇의 중량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굽구멍(透窓)을 뚫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굽다리접시는 다른 어떤 기종(器種)보다도 그릇뚜껑이 따로 제작되어 덮이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시기의 같은 유구에서도 뚜껑없는굽다리접시(無蓋高杯)가 있는가 하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도 함께 출토된다. 이 굽다리접시는 회청색을 띠는 경질소성의 굽다리접시(高杯)로 뚜껑받이는 내경하고 뚜껑받이턱은 돌출하였다. 굽다리는 짧고 나팔형으로 벌어졌다. 전체적으로 물레의 회전자국이 남아 있으며 굽 안바닥에 「×」기호가 시문되어 있다.
1759
토기병(土器甁)
한국(韓國)
토제(土製) 연질(軟質)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고대부장품(古代副葬品)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092 / 000
상세설명
[정의]
토기(土器)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이다.
[발달과정/역사]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신석기시대 이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전환하면서 식량을 저장하고, 식수를 담아두는 용기가 필요하게 되면서 출현하였다. 긴목항아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에 이르가까지 계속 사용된다. 특히 신라와 가야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신라의 것은 어깨목이 각을 이루며 바닥에 대(臺)가 달리는 경우가 많고 동체(胴體)에 기하학적 무늬가 있고 토우(土偶)를 붙이기도 한다. 가야(伽耶)의 것은 어깨와 목이 곡선으로 이어지며, 대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굽받침이나 높은 받침대 위에 올려진다. 무늬는 물결무늬(波狀文)가 주류를 이룬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토기는 점토를 물에 개어 빚은 후 불에 구워 만든 용기로 보통 500~1000℃이하에서 구워지지만 그 이상에서 구워진 것은 도기(陶器)라 부르는데,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오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토기라 부른다. 토기는 만들기 쉬운 반면 부서지기 쉬어서 신석기시대 이래로 유적 출토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각 시대별로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주류를 이루며 덧띠무늬토기(隆起文土器), 단도마연(丹塗磨硏)토기, 가지무늬(彩文)토기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는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紅陶), 검은간토기(黑陶) 등이 있다. 철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와 타날문도기가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각각 특징적인 토기들이 제작·사용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가까워 그 영향을 많이 받아, 한식(漢式)계통의 회색 또는 흑회색의 납작바닥토기, 손잡이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백제토기는 승석문(繩蓆文)이 보편적으로 시문되고, 삼족기가 존재하며 납작바닥토기가 많고, 형태가 특이한 그릇받침(器臺)가 출토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신라토기는 타날문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정선된 태토에 굴가마에서 환원염으로 구웠으며 녹로를 사용하여 다량으로 생산하였다. 밀폐된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진 신라토기는 두드리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아주 단단한 것으로 그릇의 종류로는 긴목항아리(長頸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굽다리접시(高杯) 등이 중심을 이룬다. 이 토기는 회백색을 띠는 연질소성의 토기병으로 목은 짧고 구연부(口緣部)는 외반되었다. 동체(胴體)는 구형(球形)이고 바닥은 평저형식이나 균열이 나있다. 동체 하부(下部)가 일부 변색(變色)되어 있고 어깨의 일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있다. 전체적으로 물레의 회전자국이 남아있을 뿐 문양은 시문되지 않았다. 구연이 일부 결실되었다.
1758
다리미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재봉구(裁縫具) 다리미(다리미)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090 / 000
상세설명
[정의]
옷이나 피륙의 구겨진 주름살을 펴는 데 사용되는 기구.
[발달과정/역사]
한자어로는 '울두(複斗)' 또는 '화두(火斗)'라고 한다. 또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고무(怯沐)는 속명으로 다리우리라고 하며, 불붙은 숯을 넣고 옷감을 펴는 것"이라 하여, 고무라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다리우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형태는 쇠붙이로 연엽(蓮葉)대접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밑이 반반하고 자루가 달려 있으며, 안에는 숯불을 담아 달구었다. 다리미는 예로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으로, 그 유물이 신라고분인 천마총과 백제고분인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무령왕비가 사용하였을 청동다리미는 그 형태가 연잎대접모양으로, 화로와 같이 전이 있고 전 한쪽에 긴 자루가 달려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도 삼국시대의 것과 별차이가 없는데, 조선 후기는 다리미의 형태가 변형되고 있다. 즉, 다리미의 전이 없어지고 운두가 비스듬히 경사지게 되었으며, 내부에는 밑바닥의 중앙으로부터 8방 혹은 12방으로 뻗어나간 방사형 선문(線文)을 넣기도 하는 등 장식을 하였다. 재료는 주로 무쇠였고 철제도 있었다. 그 뒤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는 밑바닥을 전기열로 덥히는 전기다리미를 쓰게 되었다.
1757
등잔대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조명구(照明具) 등잔걸이(燈盞걸이)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5088 / 000
상세설명
[정의]
등잔을 적당한 높이에 얹도록 한 일종의 등대(燈臺).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등경(燈檠)의 형태는 널짝한 하반에 서너개의 거치형 단급이 있는 등가(燈架)가 세워져 이 단급에 등잔걸이를 걸쳐 놓아 등잔이 안정감 있게 얹히도록 하였으며, 등잔 밑에는 우각형, 유방형, 타구형의 기름받이를 달아 놓은 것으로서 상하귀천의 구별 없이 가장 애용된 실내용 등기 양식이다. 청동·철·놋쇠·나무·도자기제가 있고, 하반경 20㎝ 내외, 높이 70㎝ 내외가 일반적인 크기이지만, 높이 120㎝ 정도의 대형등경도 있는데 이것은 제사용으로 사용되었으며, 하반경 10㎝ 내외, 높이 20㎝ 내외의 소형등경은 벽에 걸어 사용하였던 것으로 부엌에서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부엌등이라고도 한다. 이 등잔은 중간에 기름을 따를 수 있도록 몸통에 주구(注口)를 달았고, 한 줄의 양각선대(陽刻線帶)를 둘렀다. 목의 세 곳에 각각 한 줄의 음각선(陰刻線)을 둘렀다. 상부에 등잔을 얹어 사용한것이다.
1756
백자청화초문호(白磁靑畵草文壺)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항아리(항아리)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5087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백자청화(靑畵)는 유약을 입히기 전의 그릇 표면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순백자와 마찬가지로 잡물의 함유가 전혀 없는 순도 높은 장석계 유약을 그 위에 씌워서 번조한 것이다. 코발트계의 안료는 페르시아 일대에서 일찍이 개발하여 사용한 것으로 아라비아 상인의 손을 거쳐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회회청(回回靑)이라고 불렀으며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