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수납장의 총칭.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농(籠)은 개판(蓋板 : 맨 위에 댄 나무판)에 의하여 구별된다. 장은 개판(이마받이 天板)을 가지되 몸체보다 좌우로 약 3∼4㎝ 더 크고 몸체는 층별로 분리됨이 없이 통으로 쓰게 된다. 중앙에는 두 짝의 문판을 달아 2층 또는 3층 등의 칸을 만들어 의류를 보관하게 되어 있다. 농은 개판이 없으며 몸체와 천판이 같은 상자형으로서 중앙에 문판을 달아 상하로 분리되어 서로 포개놓고 의류 등을 저장하게 되어 있다. 대체로 대형 장은 방 윗목에, 소형 장은 아랫목에 놓고 썼는데, 장 위에는 혼함(婚函)·궤(櫃) 등을 올려놓고 장식하기도 한다. 종류로는 층별에 따라 2층장·3층장·4층장 등으로 불리는 것이 있고, 재료에 따라 용목장·먹감나무장·죽장(竹欌) 등으로도 불린다. 안방용 소형 장으로는 버선장·애기장·반닫이장 등이 있고, 사랑용에는 서장(書欌)·도포장·의걸이장·탁자장(卓子欌) 외에 두루마리 서권(書卷) 등을 보관하는 단층의 경축장(經竺欌)과 같은 머릿장이 있다. 그리고 주방용의 식기장으로서 찬장(饌欌)·찬탁자장(饌卓子欌) 등이 있다. 장의 구조로서 가장 눈에 뜨이는 개판짜임새는 두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두꺼운 통판을 그대로 사용한 개판(서안·문갑·머릿장용)과, 또하나는 골재(骨材)와 판재(板材)를 짜맞추어 사변을 골주(骨柱)에 직접 대고 그 안을 널판으로 끼워 맞춘 개판(장·탁자 등) 형태가 있다. 이 때 기둥과 쇠목을 이을 때는 촉짜임이 되고 모서리귀는 연귀짜임이 되는데 사변의 골주에 널판을 끼울 때는 턱솔짜임이 된다. 이와 같은 턱솔짜임은 판재가 휘거나 수축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고려된 것으로 문변자(門邊子 : 문짝의 좌우상하에 이어 댄 테두리나무)를 두른 문판 등에도 이용된다. 장은 전면에 부재(附材)를 써서 장식적 효과를 잘 나타내게 되므로 목재의 성격에 따라 골재와 판재를 선택하게 된다. 안방용 부재로는 느티나무·소나무·오동나무가 많으며, 채색을 넣어 화려한 장식을 한 것으로 수장(繡欌)·화각장(華角欌)·화초장(花草欌)·나전장(螺鈿欌) 등이 있다. 사랑용으로는 광택이 없고 검소를 선비의 모범으로 생각하여 주로 나뭇결무늬의 소박미를 나타낸 소나무·오동나무·참죽·죽재·괴목 등이 주재(主材)이다. 이 이층장은 전체 모양새를 날 일(日)자 모양으로 한 2층장으로, 반닫이와 장이 결합된 형태이다. 2층은 나무결과 무늬를 살려 좌우대칭을 이루는 엳다이로 이루어진 장으로 되어 있으며, 둥근형(圓形)앞바탕에 환(環)고리를 달았고, 둥근형(圓形)경첩을 달았다. 1층은 절반이 앞닫이 문으로 된 반닫이로 보상화형(寶相華形)앞바탕에 꺽쇠형뻗침대를 부착하고 투각칠보인동형(透刻七寶忍冬形)경첩을 달았다. 천판 밑에 4개의 서랍이 나란히 달려 있으며, 활형손걸이(弓形擧金)을 달았으며, 하단부에는 낮은 다리가 붙어 있다.
1619
패철(佩鐵)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과학기술(科學技術) 지리(地理) 방위(方位) 패철(佩鐵)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4683 / 000
상세설명
[정의]
가운데에 지남침을 장치하고 가장자리에 원을 그려 24방위로 나누어 놓아, 방위를 헤아리는 데 쓰는 기구.
[유래 및 역사]
풍수가(風水家)나 지관(地官)들이 사용하였다. 지남침의 원리는 중국에서 이미 한대(漢代)에 실용화되어 점을 치는 데 사용되었다. 그것은 4, 5세기경에는 침(針)을 자화(磁化)하여 자침을 만들어 회전할 수 있게 하여 방위를 측정하는 데 쓰는 기구로 발전하였고, 나침반·지남반·지남철(指南鐵) 혹은 패철(佩鐵) 등으로 불렸다. 풍수설과 더불어 풍수가들의 방위결정의 필수적인 기구로 쓰이게 되면서 역(易)과 방위를 연결시켜 나타낸 것을 나경(羅經) 또는 윤도라고 하였다. 풍수지남반은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말경부터 특히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초기에는 풍수지리학과 연결되어 지상(地相)을 보는 풍수가나 지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구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운관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윤도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나타나고 있다. ≪영조실록≫에는 1742년 (영조 18) 11월에 청나라에서 가져온 오층윤도(五層輪圖)를 모조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조선시대에 제작된 많은 윤도 유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윤도는 중심의 지남침을 둘러싸고 24방위를 기본으로 하는 여러 개의 동심원에 나타낸 방위명들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는 음양(陰陽)·오행(五行)·팔괘(八卦)·십간(十干)·십이지(十二支)가 들어 있다. 방위명 자체는 팔괘·십간·십이지가 조합되어 이루어져 있다. 그 방위의 배치는 다음과 같다. 팔괘의 방위를 보면, 4정방(四正方)에는 정동(正東)에 진(震), 정서(正西)에 태(兌), 정남(正南)에 이(離), 정북(正北)에 감(坎)을 배치하고, 4우방(四隅方)에는 남동(南東)에 손(巽), 남서(南西)에 곤(坤), 북서(北西)에 건(乾), 북동(北東)에 간(艮)을 배치하여 8방(八方)을 삼았다. 십간은 그것을 오행에 배분하여, 갑을(甲乙)은 목(木), 병정(丙丁)은 화(火), 무기(戊己)는 토(土), 경신(庚辛)은 금(金), 임계(壬癸)는 수(水)로 하여 방위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오행은 동에 목, 서에 금, 남에 화, 북에 수, 그리고 토를 중앙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갑을은 동쪽 부근, 병정은 남쪽 부근, 무기는 중앙, 경신은 서쪽 부근, 임계는 북쪽 부근에 배치된다. 십이지는 자(子)를 정북에 두고 시계방향으로 30°간격으로 12개를 차례로 배치하면 360°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그래서 빠지는 것이 생기게 되는데, 우선 십간에서 무와 기는 중앙이어서 제외하고, 팔괘에서 4정방은 십이지 중 자·오·묘·유를 우선하여 4개만 남기며, 십이지는 모두 사용하면 24방위도가 이루어진다. 윤도는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하였을 때, 가장 기본적으로 조합 구성되는 것이 5∼7층 정도가 된다. 그래서 휴대용 윤도는 가장 간단한 것이 12방위나 24방위를 나타낸 1층짜리이고, 그 다음이 5∼7층이다. 풍수가용 윤도 이외에 조선시대에는 12방위 또는 24방위만을 표시한 소형 지남침 또는 지남철이라 하는 것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것을 24층 윤도본의 중심인 태극에 놓고 보면 풍수가가 지상을 점치는 데 사용할 수 있고 지남침만을 따로 가지면 나침반으로도 쓸 수 있었다. 그러한 소형 지남침은 선비가 패용하는 지남철이라 하여 흔히 패철로 불렸
[정의]
모래 등의 잡물이 섞인 반자질(伴磁質)의 태토 위에 회유(灰釉)계의 유약을 씌워, 녹갈색, 고동색의 유색을 띠면서 유면이 우툴두툴하여 고르지 않은, 포개어 번조한 조질의 청자로서, 기벽이 얇고 가벼운 도기질 태토의 청자도 포함되어 있다.
[발달과정/역사]
녹청자란 1965, 1966년 인천시립박물관과 국립박물관이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 경기도 인천시 지구 경서동 요지의 「인천기 경서동 녹청자요지 발굴조사개요」에서 최순우선생이 처음으로 '녹청자'로 명명한 데서부터였으며, 가마의 퇴적층과 그 유물 조사에서 제작시기를 그 주변에서 함께 발견되는 분청자편들과 관련지어 14세기 후반 또는 15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녹청자의 제작시기는 그후 1970년 정량모선생의 「우리나라 도자기의 발달②」에서 기형과 유색으로 보아 만당오대(晩唐五代)의 중극의 지방 가마에서 제작된 청자의 영향으로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녹청자는 본격적인 청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통일신라 질그릇을 바탕으로 이러한 조질의 녹청자가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조질의 청자가 점차 세련되어 본격적인 청자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시원적인 청자로서 그 성격을 규정하기에 이르러, 오늘날에는 흔히 녹청자를 질그릇에서 청자로 가는 과도기의 시원적인 초기 청자로 널리 인식되어 있으나 최근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고려 초기부터 중기, 후기에 걸쳐 생활용의 막청자로서 널리 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녹청자의 종류로는 입부분이 곡구(曲口)된 대접류와 변형된 작은 보시기, 운드가 낮고 외반된 접시, 잔과 잔받침, 그리고 동체가 큰 유병 종류와 광구병들, 크고 작은 병들과 고려의 전형적인 매병, 몸체가 길거나 둥근 항아리와 단지, 동체가 눌려진 항아리들과, 병, 합 등의 예가 있다. 녹청자의 굽다리는 평평한 것이 많다. 접시의 경우에도 평저가 많다. 항아리와 단지의 경우도 평저이다. 대접과 보시기의 경우 대마디 굽의 굽다리를 갖춘 예가 있을 뿐이며, 병에 있어서도 평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굽다리에는 점토가 섞인 내화토 받침을 받쳐 굽거나 모래받침으로 받쳐 포개어 굽서나 거칠게 구운 예들이 대부분이다. 녹청자의 특색은 기형에 있어 고려·조선시대의 질그릇의 형태를 그대로 닮고 있는 예가 많다. 그리고 흑(갈)유 자기의 기형과도 잚은 예가 많다. 청자는 도기질(陶器質)이 대부분이며, 무게가 묵직한 것부터 가벼운 것까지 있다. 형태는 회청색의 질그릇(灰靑色 硬質陶)과 닯은 것이 많다. 일부는 양질의 청자와 분청자의 기형과 유사하며, 흑갈유 자기와도 닮은 것이 있다. 문양은 거의 없다. 그릇의 굽은 평평한 것이 많으며, 대부분 점토가 섞인 내화토 받침, 또는 굵은 모래를 굽에 받쳐서 포개어 구워냈다. 이 녹청자병은 구연부(口緣部)에서 약간 벌여졌다가 입술이 각을 이루며 꺾어져 올라 목 부분과 어깨부분, 어깨부분과 몸통부분이 만나는 곳에 각을 이루는 병이다. 그러나 구연부(口緣部)는 현재 수리한 형태라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동체부분이 매우 풍만하고, 물레 돌린 흔적이 있다. 유(釉)는 녹갈색의 청자유(靑磁釉)를 시유하였고, 일부 노태되었다. 굽은 낮은 다리굽에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정의]
청유(靑釉)를 시유(施釉)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청자(靑磁)는 철분이 극소량 들어 있는 태토 위에 철분 1~3%의 장석유(長石釉)를 바르고 환원염으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하는데, 청자색을 진하게 하기위해서는 유약을 여러 번 두껍게 발라야 한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거나 해서 유색(釉色)이 황녹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로 부르고 있다. 다만 구리성분[銅分]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 절강성 북부의 월주요(越州窯)에서는 한대부터 원시적인 청자가 만들어졌지만 5~6세기경부터는 차츰 발전하여 제작지도 화남·화북으로 퍼져나갔으며 당나라를 거쳐 송대에는 절정을 이루어 청자요가 중국 각지에 있었다. 특히 복건성, 절강성, 광동성의 해안지역에서 많은 요지가 발견되었고 청대의 경덕진료에서는 송·명대 청자의 모조품제작이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청자의 발생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말부터 중국 월주요에서 만든 원시청자인 고월자(古越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학설과 10세기 후반에 고려의 중앙집권화 및 신지배층의 중국도자에 대한 수요에서 청자제작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는 1250~1300℃의 고온에서 환원번조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배경에 두고 있는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과 유려하고 당당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그리고 독창적인 상감기법 및 문양을 특징으로 한다. 더욱이 고려 이전의 기명들이 대부분 의식용 그릇이었던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합(盒), 대접, 접시, 완(碗), 술잔, 병, 주전자 등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장식용 그릇인 꽃병[화병], 연적(硯滴), 향로에는 오리, 원숭이, 사자, 혹은 참외나 석류 등의 동식물 모습을 표현했는데 매우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매병(梅甁)은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가장 고려적인 특징을 보이는 형태이다. 소문(素文)청자는 기명의 표면에 어떠한 채색도 가미하지 않은 청자로, 정선된 흙으로 얇게 구워내기 때문에 그릇의 형태와 유약색이 뛰어난 것이 많으며 주로 청자 초기 단계에 제작되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이 청자병은 입이 나팔처럼 벌어졌다 가늘어졌으며, 넓어진 목에 어깨로부터 점차 벌어져 풍만한 동체(胴體)를 이루다가 좁아져 세워진 병이다. 기면(器面)에는 물레 성형 흔적과 타날 기법에 의한 타날문(打捺文)이 남아있다. 표면색은 회갈색으로, 경질이며, 목에 녹갈색의 자연유가 흡착되어 있다. 바닥은 평저(平底)이며, 안으로 약간 들어갔다.
[정의]
흑(갈)유(黑褐釉)란 철분이 많이 함유된 유약이 두텁게 시유되었을 때에 흑색, 흑갈색을 띠는 자기로서, 반자기질이나 자기질의 태토를 이루어 기벽이 묵직하거나 가벼운 흑(갈)유 자기가 대부분으로, 유색이 짙고 여린 경우에 따른 흑유, 흑갈유자기로 불리우고 있다.
[발달과정/역사]
흑(갈)유(黑褐釉)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최근 발굴조사 된 황해남도 봉천 원산리 청자 가마터에서 청자와 함께 발견된 예와, 1982년 고흥 운대리요지에서 햇무리굽 청자보시기들과 함께 출토된 흑유 자기편들, 그리고 해남 진산리 일대의 요지에서 수많은 녹청자와 함께 흑유, 흑갈유 자기편들이 발견된 것들이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용인 서리요지의 햇무리굽층(2층, 3층)에서 청자보시기편들과 함께 흑유 자기편이 소량 발견되었으며, 봉천 원산리 3,4호 요지에서도 햇무리굽 청자 보시기들과 함께 발견되고 있고, 고흥 운대리요지에서도 햇무리굽 청자보시기와 함께 흑유 광구병, 흑유단지 편이 발견되고 있어 先햇무리굽(4층)의 제작 시기 이후인 1022년 전후 무렵에 청자의 가마에서 청자와 함게 제작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청자의 보시기나 대접, 접시 등은 만든 예가 없고, 주로 광구병이나 단지, 병 편들이 발견되고 있어 주목되며, 태토도 철분이 많은 반자기질의 태토의 예가 대부분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형으로는 고려시대에는 광구병, 술병, 주전자, 유병, 광구의 항아리, 큰 합, 정병, 대접, 잔 드으로 만들어졌으며, 항아리 및 단지와 광구병, 술병의 예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작은 단지, 손잡이 달린 동이, 약탕기, 둥근 단지, 기름병, 대접, 귀대접, 매병, 술병, 큰 병 등이 있으며, 특히 단지와 병종류가 많이 만들어져 남아 있다. 특색은, 문양이 거의 없는 무문(無文) 위주이고, 드물게 음·양각의 연판문을 동체에 시문한 광구병 등이 있을 뿐이다. 기형은 녹청자나 도기의 기형을 닮고 있는 예가 주목되며, 녹청자와 구별이 어려운 예도 있다. 조선 초기에는 분청자의 기형을 닮고 분청자의 요지에서 제작된 예가 많으며, 흑유 자기窯에서만 제작된 듯한 술병이나 편병의 예도 남아 있다. 조선 후기에는 질그릇병을 닮거나 동이, 단지 등을 닮은 예와 칠기를 닮은 예도 있어 질그릇과 함께 생활에 널리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흑유병은 각이져 세워지고 약간 벌어진 구부(口部)와 좁아진 목,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동부(胴部)에서 중심을 이룬 병이다. 기면(器面)에는 물레의 회전 자국이 남아있고, 기포가 있다. 전면에 흑색의 유약이 시유되었으나 기면(器面)에 잿물이 떨어져 산화 박리(剝離)되었다. 바닥은 평저(平底)이며,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구연(口緣)은 수리되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