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곡식을 빻거나 찧는 데 쓰는 용구.
[개설]
소나무나 잡목의 맨 밑동을 그대로 잘라 가운데에 큰 구멍을 파서 만든 기구로 옛말로는 '절고'로 표기되었고, 지역에 따라 '도구통'·'도구'·'절기방아'라 부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절구는 통나무나 돌 또는 쇠로 만들며, 그 재료에 따라 '나무절구'·'돌절구'·'쇠절구' 등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어느 것이나 윗부분에 우묵한 구멍이 있다. 공이도 세 종류의 물질로 만든다. 나무절구의 바닥에는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구멍바닥에 우툴두툴한 쇠판을 깔기도 한다. 쇠절구는 규모가 작으며 주로 양념을 다지는 데에 쓴다. 나무절구 중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을 '양념절구'라고 한다. 나무절구는 위아래의 굵기가 같은 것이 대부분이나 남부지방에서는 허리를 잘록하게 좁힌 것을 많이 쓴다. 이에 비하여 돌절구는 상부에 비하여 하부를 좁게 깎으며, 특히 아랫부분을 정교하게 다듬고 이에 조각을 베풀기도 한다. 절구의 크기나 형태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제주도의 절구는 돌을 쪼아만든 확의 주위에 큰 함지박을 끼워놓은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곡식이 확 밖으로 튀어나와도 이내 다시 쓸어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돌절구에는 돌공이를, 쇠절구에는 쇠공이를, 나무절구에는 나무공이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확이 돌임에도 나무공이를 쓴다. 제주도에서는 이 절구를 '남방애'라고 부른다. 공이의 재료나 모양도 절구에 못지 않게 다양하다. 나무공이는 위아래가 둥글고 손에 쥘 부분만 파내었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공이의 끝부분에 돌을 박아서 쓰기도 한다. 돌공이는 공이 끝에 나무자루를 박으므로 자루와 몸이 직각을 이룬다. 쇠공이 중에도 이러한 것이 있다. 특히, 남부지방에서는 한 집에서도 크기가 다른 나무공이를 여러 개 쓴다. 공이의 허리가 걸릴 만큼 파낸 공이대를 부엌 옆 벽에 붙이고 여러 개의 공이를 걸어둔다. 절구는 주로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쓴다. 절구가 크고 일감이 많을 때에는 두 사람이 마주서서 절구질을 한다. 한 사람이 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나무주걱 같은 것으로 곡물을 뒤집어주기도 한다. 이것을 '께낌질'이라고 한다. 절구에 떡을 치기도 한다. 더러는 세탁물을 넣고 공이로 찧어서 때를 빼는 수도 있다. 또, 나무절구는 가로로 뉘어 놓고 개상으로 쓰기도 한다. 나무절구에 나무공이로 벼 한말을 찧는 데에는 한 시간쯤 걸린다. 돌공이는 나무공이에 비하여 시간이 반밖에 걸리지 않지만 공이 자체가 무거워 힘이 많이 든다. 경상남도 지방에서는 정월의 첫 소날(上丑日 상축일)에 절구질을 하면 집안의 소가 골이 아파서 죽거나 병이 생긴다고 하여 이를 삼간다. 또, 우리 나라의 중부 이남에서는 보름날 새벽에 절굿공이를 가지고 집마당이나 밭에 가서 "디지기방아 찧자, 디지기방아 찧자."하면서 찧고 다닌다. 이렇게 하면 굼벵이나 두더지·독벌레들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보름날 아침 절굿공이로 마당의 네 귀퉁이를 찧고 나서 땅이 얼마나 들어갔는가를 살핀다. 이때에 동쪽은 봄, 남쪽은 여름, 서쪽은 가을, 북쪽은 겨울로 여기고 땅이 많이 팬 쪽의 땅은 그 해에 물이 흔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가뭄이 든다고 점을 친다.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절구에 여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보름날 아침에 절구 주위에 열두 달을 상징하는 열두 가지 음
1524
옥람한일동유묵-예서(玉藍韓溢東遺墨-隸書)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서화(書畵) 글씨(글씨) 일반서예(一般書藝)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일반회화(一般繪畵)
유물번호
004530 / 000
상세설명
[정의]
한자 서체의 하나.
[명칭 및 출처]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의 국가통일기에 걸쳐, 그때까지의 공식서체였던 전서(篆書)의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예서는 소전[小篆:진(秦)의 이사(李斯)가 대전(大篆)과 주문(蟬文)을 정리하여 놓은 서체]에서 2분(分)은 변하고 8분(分)을 남겨 놓았다 하여 이것을 팔분(八分)이라고도 하며 또 고예(古隷)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과 자체(字體)에 많은 이설이 있는데, 각가(各家)의 저작을 통하여 명칭 및 출처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서:진대(晉代) 화가인 위항(衛恒)은 "예서란 전의 빠른 것(隷書 篆之捷也)"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서가 너무 번잡하여 그것을 간첩(簡捷)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또 송대(宋代) 화가인 서개(徐剛)의 ≪설문해자≫ 서(序)에 의하면 진시황 때 사람 정막(程邈)이 대전을 성개(省改)하였다 하므로, 예서는 소전과 동시에 이루어진 가장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고예:≪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두릉(杜陵)의 추호(秋胡)가 상서(尙書)에 능통하며 고예를 잘 썼다고 하고, 고예는 정막이 옥중에서 대전을 변화시켜 만든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고예는 진예(秦隷)와 거의 동종(同種)의 자체이나 후대에 명칭이 달라졌을 뿐이며, 이 자체의 특징은 '불위체세(不爲體勢)'라는 점에서 한대의 예식자체(隷識字體), 즉 파책조법(波峀挑法)이 없는 한예(漢隷)가 그것이다. ③ 진예:오구연(吾丘衍)의 ≪학고편(學古編)≫에 "진예는 체세(體勢)는 갖추지 않았으나 한의 관지(款識)의 전자(篆字)와 가깝다."고 하였다. ④ 팔분:한대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 장회관(張懷瓘)·오구연 등의 설에 의하면, 팔분은 소전 이후이고 한예 이전의 자체라고 하므로, 진예나 고예가 곧 팔분을 말하는 것이다. ⑤ 한예:후한(後漢) 비각(碑刻)에 파책이 있는 서체를 한예라 한다고 하였다. ⑥ 초예(草隷)·예초(隷草):진서(晉書) ≪신밀전(辛謐傳)≫에 "밀(謐)은 학문이 해박하고 글을 잘 하여 초예를 잘 썼으니 당시의 해법(楷法)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또 북위(北魏)의 서예가 왕음(王駙)은 "차중(次仲)이 비로소 파세(波勢)를 띠어 건초(建初) 연간에 예초로 해법을 이루었으니 자방(字方) 팔분으로 말하기를 모범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초예·예초는 일체(一體)의 것으로 예서의 초솔(草率)한 맛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⑦ 해서(楷書):장회관은 "팔분은 본래 해서를 이름이니, 해서란 법(法)이요, 식(式)이요, 모(模)라."하였다. ⑧ 진정(眞正):장회관의 ≪육체서론(六體書論)≫에 "예서는 정막이 만들었으니 자(字)가 모두 진정하여 또한 진서(眞書)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당육전(唐六典)≫에 예서는 후세의 해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석경(唐代石經) 및 약간의 비갈(碑碣)은 조법(挑法)의 예서로 썼으되 이것을 소위 팔분이라 하였으니 일반으로 말하는 당예(唐隷)이다. 또 당인(唐人)의 전적(典籍)이나 공문(公文)은 자연히 후세에 말하는 당해(唐楷)로 서사(書寫)되었다.
[명칭변천]
예서와 팔분 및 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역대 서체의 명칭 변천과 현존하는 역대 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서는 고예(혹 진예) 및 분예(分隷, 또는 한예)의 2종이다. 고예는 전서의 빠른 것으로 그 체는 방편(方扁)하며 파세(波勢)가 없고 진대(秦代)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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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절구
한국(韓國)
금속(金屬) 철제(鐵製)
용도기능
과학기술(科學技術) 의료(醫療) 제약(製藥) 약절구(藥절구)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4527 / 000
상세설명
[정의]
약을 빻는데 사용하는 절구.
[개념]
원래는 일반 가정에서 절구로 사용되어 깨소금·마늘·생강 등의 조미료를 빻아 쓰는 용기인데, 때로는 가정에서 필요한 구급약을 빻아 쓰기도 하였다.
[역사]
절구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자세하지는 않으나, 한대(漢代) 《서청고감(西淸古鑑)》에 한쌍감구(漢雙鑑臼)라 이름 붙여진 절구가 있어 적어도 한대 이전부터 사용·계승되어 왔으리라 짐작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절구는 갈돌의 변형으로 갈돌이나 약연이 곡물 혹은 약의 손실이 많은데 비해서 절구는 손실이 적어 갈돌의 결점을 보완한 기구로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절구는 가루를 내는 데는 좋으나 즙을 내기에는 적합치 못한 것이 결점이다. 약절구에는 그 만든 재료에 따라 쇠약절구·나무약절구·놋쇠약절구 등이 있다. 쇠약절구는 밑부분에 나무 받침대를 대어서 흔들리지 않고 안전하게 고정시켰으며, 나무약절구는 용목(느티나무 뿌리 부분)을 잘라 팔각으로 다듬고 가운데를 움푹 파서 절구로 삼고 같은 나무로 공이를 만들어 절구와 공이의 부딪히는 힘을 이용해 가루를 만들어 사용했다. 놋쇠약절구는 손위에 올려 놓고 긴 공이를 이용해서 손과 손의 힘을 조절해 가며 사용한다.
1522
백자접시(白磁楪匙)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접시(접시)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4500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접시는 구연부(口緣部)는 외반되었고, 구연에서 굽에 이르는 외측면선(外側面線)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무문(無文)이며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 있다. 회청색을 띠는 백자유(白磁釉)가 굽 안바닥을 제외한 전면에 시유되었으나 시유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빙렬(氷裂)이 나있고 구연부의 유(釉)는 박리되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바닥에 내화토(耐火土)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내저 중앙 네곳에 내화토를 받치고 포개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1521
한수재년보(寒水齋年譜)
한국(韓國)
지(紙)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유물번호
004441 / 000
상세설명
[정의]
한수재 권상하(寒水齋 權尙夏 1641~1721)의 연보(年譜).
[인물]
한수재는 조선조 학자로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본관은 안동(安東), 집의(執義) 격(格)의 아들이다. 현종 1년(1660)에 진사(進士)시에 입격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 특히 송시열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다. 이이(李珥)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宋時烈)에게 계승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지도자로서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으며, 그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이 인물성편재문제(人物性偏在問題)로 논쟁하자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동일하다는 이간의 학설(學說 : 洛論)에 대해 인과 물은 성이 각기 다르다는 한원진의 학설(學說 : 湖論)을 지지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충주(忠州)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청풍(淸風)의 황강서원(黃岡書院), 정읍(井邑)의 고암서원(考巖書院), 성주(星州)의 노강서원(老江書院), 보은(報恩)의 산앙사(山仰祠), 예산(禮山)의 집성사(集成祠), 송화(松禾)의 영당(影堂) 등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내용]
이 책은 영조 37년(1761) 경상감영(慶尙監營)에서 목판본으로 개간(開刊)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