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 장르
-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 유물번호
- 004434 / 000
- 상세설명
- [정의]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의 문집(文集).
[인물]
병계는 조선조 학자, 자는 서응(瑞鷹), 호는 병계(屛溪)·구암(久菴), 본관은 파평(坡平), 참판 비경(飛卿)의 손자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숙종 40년(1714) 진사시(進士試)에 입격, 유일(遺逸)에 천거되어 영조 1년(1725) 청도군수(淸道郡守)를 거쳐 1738년 집의(執義)에 이르고, 영조 17년(1741) 주자(朱子)를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케 한 주창자로서 삭직(削職)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자의(諮議)·찬선(贊善) 등을 역임, 판서에 이르렀다.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론(湖論)을 주장했으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내용]
이 책은 60권 30책으로 소장본은 23책이며 고문(告文), 제문(祭文), 애사(哀辭) 등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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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도기능
- 문화예술(文化藝術) 문헌(文獻) 문집류(文集類) 문집류(文集類)
- 장르
-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고도서(古圖書)
- 유물번호
- 004429 / 000
- 상세설명
- [정의]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 선생 연보. [인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 선생 연보. 율곡은 조선조 학자·문신으로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 찰방(察訪) 원수(元秀)의 아들로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로 강릉(江陵) 출신이다.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우고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 16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입산,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儒學)에 전심하여 23세 때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났다. 명종 19년(1564) 생원시(生員試)·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장구(章句)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함을 학문을 연구하는 태도로 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사상으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쟁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養成) 및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조자앙(趙子昻)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 선조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豊德)의 귀암서원(龜巖書院), 서흥(瑞興)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황주(黃州)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우계는 조선조 학자로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墨庵), 본관은 창령(昌寧), 수침(守琛)의 아들이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覆試)를 못치르자 과거(科擧)를 단념,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다. 일찍부터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는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이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儒學界)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이의 문인인 조헌(趙憲)·한교(韓嶠)·황신(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한때 관작(官爵)을 추탈당했다가 인조 초에 복관(復官), 좌우정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령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내용]
이 책의 서문은 현종 6년(1665)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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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도기능
- 식(食) 기타(其他) 급수(給水) 기타(其他)
- 장르
-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 유물번호
- 004406 / 000
- 상세설명
- [정의]
짐을 얹어 사람이 지고 다니게 만든 기구.
[역사]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운반기구의 하나였다. 지게는 양다리방아와 더불어 우리가 발명한 가장 우수한 연장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지개'로 불리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게'라는 말이 처음 나타난 책은 1690년(숙종 16)에 나온 ≪역어유해(譯語類解)≫이다. 청나라 말 교본이었던 까닭에 지게의 뜻을 풀어서 '배협자(背狹子)'로 적었으며, 1748년(영조 24)에 출간된 ≪동문유해(同文類解)≫(만주말 자습서)의 저자도 이를 따랐다. 지게를 우리말에 가깝게 적은 최초의 책은 1766년에 간행된 ≪증보산림경제≫로, 저자는 이를 '부지기(負持機)'로 적었다. 지게를 나타낸 '지기'에 '진다'는 뜻의 부(負)를 덧붙인 것이다. 이로써 '지게'라는 이름이 18세기 무렵에 이미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몸은 주로 소나무로 만들며 처음부터 이를 쓸 사람의 체구에 맞도록 깎는다. 한 농가에 여러 틀의 지게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게는 전국 어느 곳에서나 두루 사용하고 또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어 형태나 크기, 등태의 모양 등이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세장은 밤나무나 박달나무 같은 단단한 목재를 쓴다. 가지가 약간 위로 벋어 난 자연목 두 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우고 사이사이에 세장을 끼우고 탕개로 죄어서 사개를 맞추어 고정시켰다. 위아래로 멜빵을 걸어 어깨에 메며,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으로 짠 등태를 달았다. 지게를 세울 때는 작대기를 세장에 걸어서 버티어 놓는다. 곡물을 비롯하여 나무·거름 등 사람의 힘으로 나를 수 있는 대부분의 물건을 옮기는 데 쓰며 건장한 남자는 한 지게에 50∼70㎏을 싣는다. 무게는 5∼6㎏ 내외이다. 경기도 반월에서는 세장이 여섯인 지게가 사용된다. 이것은 세장의 수가 가장 많은 예이다. 지게 몸은 대체로 직선을 이루고 있으나 전라도 일부에는 중앙부가 가장 좁고 상하부가 밖으로 약간 벌어지게 만들어 쓴다. 또 등태는 짚으로 방석처럼 짜서 대는 것이 보통이나 강원도 도계에서는 세장과 세장 사이를 새끼로 두껍게 감아서 등태를 대신한다. 전라북도에서는 새끼로 등판을 얇게 짜서 붙인 다음 짚을 반으로 접어서 두툼하게 우겨 넣어 쓴다. 그러나 전라북도 위도에서는 등태를 전혀 대지 않고 세장을 너르게 깎았다. 도서지방이므로 지게로 짐을 옮겨야 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곳의 지게는 목발에 구멍을 뚫고 밀삐를 꿰어 넣은 다음 옭매어서 고리를 삼았다. 평야지대에서는 새고자리의 너비가 대단히 좁은 반면 목발과 목발 사이가 많이 벌어진 지게를 쓴다. 그리고 지게 몸의 길이가 길어서 짐을 지고 가던 사람은 무릎을 약간 구부리기만 해도 땅에 닿아 쉴 자리를 따로 구하지 않고 아무데에서나 지게를 내려놓을 수 있다. 한편, 산간지방에서 사용되는 지게는 몸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몸이 길면 비탈을 오르내리는 데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전라북도 정읍·부안·김제 등의 중서부지역에서는 지게의 몸과 가지가 별도로 구성된 특이한 것이 사용된다. 몸은 소나무이나 가지는 참나무를 깎아서 만들고 몸에 구멍을 뚫어 끼웠으며, 가지의 힘이 약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가지와 몸을 새끼로 묶어 놓았다. 이 때문에 가지와 몸 사이의 각도가 45°쯤으로 좁아져서 짐을 실을 공간이 많이 줄어 볏단처럼 부피가 많은 것을 실을 때에는 긴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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