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물체의 무게를 다는 데 쓰는 기구의 총칭.
[유래]
저울을 언제부터 썼는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청동야금을 시작한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이미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이 더욱 발전한 기원전 1000년경에는 저울이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이때에는 청동단검을 비롯하여 창끝·활촉·방패 따위의 무기류와 칼 따위의 생활구, 각종 마구류, 여러 가지 장식품들이 대량 생산되었다. 이들은 모두 구리·납·아연·철·은·주석 따위를 정밀하게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들의 비율을 조정하는 데 저울이 필수품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종류]
저울에는 맞저울·대저울·앉은뱅이저울·용수철저울·약저울 따위가 있다. ① 맞저울:천평칭(天平秤) 또는 천칭(天秤)이라고도 한다. 가운데에 세운 줏대에 지렛대를 걸쳤으며, 양쪽 끝에 똑같은 크기의 저울판을 달았다. 한쪽에는 달 물체를, 다른 쪽에는 추를 놓아 평행을 이루게 하여 무게를 다는 것이다. 맞저울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양쪽을 똑같이 하여 그 무게를 알아내는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인류가 최초로 쓴 것이 맞저울로서,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이집트에서 오늘날 맞저울의 원리와 구조가 거의 같은 것이 사용되었다. 그 뒤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러 접시를 매다는 방법 등의 개량된 저울이 나왔으며, 당시에는 이것으로 0.5g의 무게까지 측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박지원(朴趾源)은 그의 ≪연행록(燕行錄)≫ 선집에 중국의 맞저울[天平]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다음, 이 저울의 정확성에 감탄하면서 술까지도 맞저울에 달아 파는 중국인들의 관행을 부러워하는 내용을 실었다(연원직지 제6권 유관별록). 또 영조 때의 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외집 10권 연기·기용),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맞저울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맞저울은 달고자 하는 물체와 무게가 같은 추, 그리고 양쪽의 무게를 받는 튼튼한 줏대가 필요한 까닭에 귀금속이나 약재 따위의 가벼운 물체를 다는 데에만 쓰였다. ② 대저울:이러한 약점을 보완하여, 제법 무겁고 부피 또한 큰 물체를 달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대저울이다. 이것은 지렛대에 눈금을 매긴 것으로, 물체의 무게에 따라 추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평형을 이루었을 때 그 위치의 눈금을 읽어 무게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 저울은 기원전 수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나왔으며, 기원전 200년경 이탈리아의 위로(Wiro)가 발명하였다고 전한다. '로마저울'이라는 서양 이름은 이에서 비롯하였다. 이 저울은 소형과 대형 두 가지가 있다. 소형은 한 끝에 작은 저울판이 달린 것으로, 이에 물체를 올려놓아 무게를 달지만 쌀가마같이 부피가 크고 무거운 것은 대형을 써야 한다. 이때에는 물체를 새끼 따위로 단단히 묶은 다음 이를 저울고리에 거는 한편, 손잡이 끈에 굵은 막대기를 걸고 두 사람이 마주서서 어깨로 받치며, 다른 한 사람이 추를 움직여서 무게를 알아낸다. 우리 농촌에서는 근래까지도 곡물 가마 따위의 무게를 이 저울로 달았다. ③ 앉은뱅이저울:용수철에 힘을 가하였을 때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원리를 이용한 저울이다. '앉은 저울' 또는 '대칭(臺秤)'이라고도 한다. 저울판 위에 물체를 올려 놓고 용수철에 의한 무게의 전달을 위쪽 저울대에서 추로 조절하
1219
저울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상업(商業) 계측/계량(計測/計量) 저울및추(저울및추)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06 / 000
상세설명
[정의]
물체의 무게를 다는 데 쓰는 기구의 총칭.
[유래]
저울을 언제부터 썼는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청동야금을 시작한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이미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이 더욱 발전한 기원전 1000년경에는 저울이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다. 이때에는 청동단검을 비롯하여 창끝·활촉·방패 따위의 무기류와 칼 따위의 생활구, 각종 마구류, 여러 가지 장식품들이 대량 생산되었다. 이들은 모두 구리·납·아연·철·은·주석 따위를 정밀하게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들의 비율을 조정하는 데 저울이 필수품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종류]
저울에는 맞저울·대저울·앉은뱅이저울·용수철저울·약저울 따위가 있다. ① 맞저울:천평칭(天平秤) 또는 천칭(天秤)이라고도 한다. 가운데에 세운 줏대에 지렛대를 걸쳤으며, 양쪽 끝에 똑같은 크기의 저울판을 달았다. 한쪽에는 달 물체를, 다른 쪽에는 추를 놓아 평행을 이루게 하여 무게를 다는 것이다. 맞저울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양쪽을 똑같이 하여 그 무게를 알아내는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인류가 최초로 쓴 것이 맞저울로서,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이집트에서 오늘날 맞저울의 원리와 구조가 거의 같은 것이 사용되었다. 그 뒤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러 접시를 매다는 방법 등의 개량된 저울이 나왔으며, 당시에는 이것으로 0.5g의 무게까지 측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박지원(朴趾源)은 그의 ≪연행록(燕行錄)≫ 선집에 중국의 맞저울[天平]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 다음, 이 저울의 정확성에 감탄하면서 술까지도 맞저울에 달아 파는 중국인들의 관행을 부러워하는 내용을 실었다(연원직지 제6권 유관별록). 또 영조 때의 학자인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외집 10권 연기·기용),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맞저울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맞저울은 달고자 하는 물체와 무게가 같은 추, 그리고 양쪽의 무게를 받는 튼튼한 줏대가 필요한 까닭에 귀금속이나 약재 따위의 가벼운 물체를 다는 데에만 쓰였다. ② 대저울:이러한 약점을 보완하여, 제법 무겁고 부피 또한 큰 물체를 달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대저울이다. 이것은 지렛대에 눈금을 매긴 것으로, 물체의 무게에 따라 추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평형을 이루었을 때 그 위치의 눈금을 읽어 무게를 알아내는 것이다. 이 저울은 기원전 수세기에서 1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나왔으며, 기원전 200년경 이탈리아의 위로(Wiro)가 발명하였다고 전한다. '로마저울'이라는 서양 이름은 이에서 비롯하였다. 이 저울은 소형과 대형 두 가지가 있다. 소형은 한 끝에 작은 저울판이 달린 것으로, 이에 물체를 올려놓아 무게를 달지만 쌀가마같이 부피가 크고 무거운 것은 대형을 써야 한다. 이때에는 물체를 새끼 따위로 단단히 묶은 다음 이를 저울고리에 거는 한편, 손잡이 끈에 굵은 막대기를 걸고 두 사람이 마주서서 어깨로 받치며, 다른 한 사람이 추를 움직여서 무게를 알아낸다. 우리 농촌에서는 근래까지도 곡물 가마 따위의 무게를 이 저울로 달았다. ③ 앉은뱅이저울:용수철에 힘을 가하였을 때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원리를 이용한 저울이다. '앉은 저울' 또는 '대칭(臺秤)'이라고도 한다. 저울판 위에 물체를 올려 놓고 용수철에 의한 무게의 전달을 위쪽 저울대에서 추로 조절하
1218
백자발(白磁鉢)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발(鉢)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2105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궁전에서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했으므로 백자의 생산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민간에서는 대부분 분청사기를 사용핬다. 조선시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5세기경부터는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7세기경부터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 청자와 마찬가지로 상감백자, 철화백자 등의 종류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백자는 청자보다 더 순수한(철분이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태토인 백토(高嶺土)를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고 철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무색투명의 장석질 유약을 입혀 1300℃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번조의 방식으로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백자발은 구연(口緣)은 외반되었고, 외측면선(外側面線)은 구연부(口緣部) 아래에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내면(內面) 중앙(中央)에 내저원각(內底圓刻)이 있고, 내외면(內外面) 모두 무문(無文)으로, 외면(外面)에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있다. 담청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으나, 빙렬(氷裂)이 나있고, 일부 산화 변색되었다. 굽은 다리굽이며, 굽다리 바닥 네 곳에 내화토를 받치고 번조하였다. 내저(內底) 중앙(中央)에 모래 부스러기가 묻어 있다. 기면(器面)이 고르지 못하다.
1217
대금
한국(韓國)
나무(나무) 대나무(대나무)
용도기능
문화예술(文化藝術) 음악(音樂) 악기(樂器) 대금(대금)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03 / 000
상세설명
[정의]
국악의 대표적인 관악기로 황죽(黃竹) 또는 쌍골죽(雙骨竹)으로 만든 횡적(橫笛), 대금(大魁)이라고도 하며, 시나위젓대와 구분할 때는 정악대금(正樂大魁)이라고 한다.
[내용]
문묘제례악과 대취타(大吹打)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정악(正樂)·민속악에 널리 사용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중금(中魁)·소금(小魁)과 함께 신라의 삼죽(三竹)이라고 하였고, ≪고려사≫에 의하면 대금이 13공(孔)을 가졌다고 하였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취공(吹孔) 1개, 청공(淸孔) 1개, 지공(指孔) 6개, 칠성공(七星孔) 5개와 함께 13공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사용되는 대금의 길이는 82㎝, 지름은 2㎝ 정도이고 취공과 청공이 각 1개, 지공 6개, 칠성공이 1, 2개 있다. 취공에서 가장 가까운 지공부터 1공·2공 등으로 명명되는데, 제1공은 왼손 집게손가락, 제2공은 왼손 가운뎃손가락, 제3공은 왼손 약손가락, 제4공은 오른손 집게손가락, 제5공은 오른손 가운뎃손가락, 제6공은 오른손 약손가락으로 짚으며, 이러한 운지법(運指法)은 중금·당적(唐笛)의 경우에도 같다. 젓대는 다른 횡적류와는 달리 취공부분을 연주자의 왼쪽 어깨에 올려놓고 불고, 취공과 지공, 지공과 지공 사이의 간격이 비교적 긴 편이어서 연주에 신체적 숙달이 필요하다. 음역(音域)은 2옥타브 4도(bb-eb)로 되어 있다. 같은 운지법으로 평취(平吹)를 하면 저취(低吹) 때보다 1옥타브 배음(陪音)이 되지만, 역취(力吹)를 할 때는 평취의 같은 운지법에서보다 5도 높은 배음이 발생하고 운지법 자체도 약간 달라진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저취와 평취 때 제1공을 막고 2·3·4공을 열거나 혹은 1·2·3·4공을 열 때는 편의상 5·6공을 막고, 1·2공을 막고 3·4·5공을 열 때는 편의상 6공을 막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예외적인 운지법은 음정 자체에는 변화를 주지 않고 편의상 사용되는 운지법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 음을 내기 위한 한 가지 이상의 운지법은 현행 젓대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악기의 성능에 따라 약간 다를 수도 있다. 젓대는 음역이 넓고 고정된 음고(音高)를 지니고 있어 합주할 때 다른 악기들이 젓대의 임종(林鐘)에 맞추어 조율한다. 또, 음량이 풍부하고 비교적 넓은 취공을 입술로 조절하며 음높이를 조절할 수 있어 국악기 중 대표적인 독주악기로도 자주 쓰인다. 시나위를 연주하는 시나위젓대의 기본적 구조는 정악대금과 비슷하나, 대금보다 길이가 짧고 지름도 작기 때문에 연주하기에 신체적으로 훨씬 쉽다. 시나위대금의 취공은 정악대금보다도 큰데, 특히 청(淸)울림소리가 정악대금에 비하여 더 많이 난다. 시나위대금은 정악대금보다는 악기 혹은 연주자에 따라 2, 3도 높은데, 실제음악에서 음높이를 조절할 때 입술로 부분적으로 막은 취공의 지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1216
자(尺)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상업(商業) 계측/계량(計測/計量) 자(자)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102 / 000
상세설명
[정의]
길이를 재는 단위. 척(尺)이라고도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치의 열갑절, 1m의 33분의 10이다. 고대 한·중문화권에서는 물체의 크기를 양적으로 판단하는 데 열 손가락의 폭(幅)과, 양팔을 폈을 때의 한 발[尋]과 한 길, 한 걸음의 거리 등을 기준으로 하여 왔다. 그러나 인지의 발달과 더불어 길이의 표준도 정확하게 제도화시켜 통일적인 통용을 하게 되자 중국의 주공(周公)은 10지폭(指幅)을 지척이라 하였고 뒷날 주척(周尺)으로 통용되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10지폭인 상태로 표준척도로 사용되어 왔다. 또 중국 은(殷)나라 척도로 보아야 할 기전척(箕田尺)이 우리 나라에서는 표준척도로 사용되어 왔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척이다. 통일신라 때에는 당나라에서 당대척(唐大尺)과 주척이 도입되어 기전척과 같이 통용되었으나, 조선시대부터는 명나라의 영조척(營造尺)이 도입되어 전래된 주척과 함께 사용되고부터 우리의 전통 표준척이었던 기전척은 물론 당대척도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이밖에도 세종 때에는 조례기척·포백척·황종척 등도 함께 사용되었는데, 척도의 종류가 여러 가지 사용된 것은 각각 사용되고 있던 용도가 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