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부삽은 아궁이나 화로의 재를 치거나 숯불이나 불을 담아 옮기는 데 쓰는 조그마한 삽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쇠붙이로 네모가 지거나 둥글게 만들되 바닥이 좀 우긋하고 긴 자루가 달려 있다. 화로의 재를 눌러 덮기 위하여 끝이 네모나고 자루의 한 끝에 꼭지를 붙인 것도 부삽이라 한다. 꽃삽은 어린 식물을 옮겨 심을 때 쓰는 흙손만한 작은 삽으로 모종삽이라고도 한다.
1204
인두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재봉구(裁縫具) 인두(인두)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079 / 000
상세설명
[정의]
불에 달구어 옷의 솔기나 모서리 등 천의 구김살을 눌러 펴는 데 사용하는 바느질 용구.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무쇠로 만들며 바닥이 반반하고 긴 손잡이가 달려 있다. 손으로 잡는 부분은 나무를 박아 끼우고 있다. 형태는 조선시대의 유물을 살펴보면, 인두머리의 끝이 뾰족한 것, 모진 것, 유선형인 것 등이 있다. 인두머리가 뾰족한 것은 저고리의 당코깃·섶코·버선코·깃궁둥이·배래·도련 등의 정교한 곡선을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유물을 보면, 인두머리의 밑면은 너비가 0.8∼1.5㎝이고, 앞쪽으로 점점 좁아지는 이등변삼각형이며, 인두머리의 높이는 2∼4㎝이고, 인두머리 전체길이는 5∼7.5㎝이다. 여기에는 인두머리 끝의 곡선이 완만한 것과 굴곡이 심한 것 등이 있기는 하나 마치 저고리 섶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자루의 길이는 9∼12㎝이고, 손잡이를 합한 전체길이는 33.3∼44㎝이다. 모진 것은 솔기나 모서리를 눌러 다릴 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인두머리 밑면은 길이 6㎝, 너비 1.8㎝인 장방형으로 편편하며 윗면은 약간 좁다. 나무손잡이 길이는 10㎝ 정도이고 전체길이는 34.5㎝이다. 유선형의 것은 조선시대 말기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현대의 전기인두와 형태가 같다. 인두머리의 바닥은 유선형이며, 길이 10.6㎝, 너비 4.5㎝이고, 윗면은 길이로 능선(稜線)이 있다. 전체길이는 35.5㎝이며, 13㎝의 나무손잡이가 달려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인두가 있었는지는 유물이나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포(袍)나 저고리의 곡선에 둥글고 뾰족한 곳이 많았으므로 섬세한 선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이것이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인두와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두판이다. 이것은 너비 20㎝, 길이 60㎝ 내외의 장방형 나무판 위와 아래에 솜을 도톰하게 두고 무명이나 비단헝겊으로 씌운 것이다. 인두판을 양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인두질을 하였으며, 솔기를 꺾거나 풀칠을 할 때에도 썼다.
1203
백자이무강부인최씨지석(白磁李無疆夫人崔氏誌石)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사회생활(社會生活) 의례생활(儀禮生活) 상장(喪葬) 묘지(墓誌)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2078 / 000
상세설명
[정의]
피장자의 성명, 직함, 가족세계, 생시행적 등을 써서 무덤 가운데에 남기는 기록물이다.
[발달과정/역사]
무덤방(墓室)에 직접 묵서(墨書) 혹은 주서(朱書)하거나 무덤방 벽면에 새기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돌 위에 새기는 것이나 틀을 이용하여 벽돌, 혹은 주철을 소재로 작성된 것에서 청자나 백자에 쓰여진 것으로 남겨진 것 등이 시대와 피장자의 신분, 장법 등에 따라서 다양하다. 원래 묘지는 중국에서 동한(東漢) 시기에 기원하여 위진시대 이후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국에도 유입된 것이라 하겠다. 河南省 洛陽에서 출토된 한(漢) 연평원년(延平元年:A.D. 106) 고무중(賈武仲)의 처 마강(馬姜)의 묘지는 기재 내용이 묘지에 가까운 것이긴 하지만 완성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그런데 江蘇省 丕縣에서 발견된 무우(繆宇)의 묘에는 뒷방(後室) 입구 상단에 피장자의 성명, 사망, 장례일자, 관직, 송사(頌辭) 등의 내용이 새겨 있다. 한국에서 묘지라 하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묘에서 주로 보이는 명문이 새겨진 방형의 소석판(小石版)이나 도판(陶版) 등의 형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넓은 의미에서 묘지라고 하면 무덤의 벽면에 쓰여지거나 새겨진 명문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는 무덤방 벽면에 묵서로 묘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현재 3기의 고분이 그러한데 모두루총(牟頭婁塚), 동수묘(冬壽墓)로 알려진 안악(安岳) 3호분, 그리고 덕흥리(德興里) 고분이 그것이다. 협의의 개념에서 소판의 형식을 빌린 묘지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나온 것이다. 벽돌무덤인 무녕왕릉의 널방(玄室) 입구에서 왼쪽에는 왕비의 지석이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왕의 것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양나라 때 오수전이 한 꾸러미 놓여 있었다. 사실 무녕왕릉의 묘지석은 묘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중국의 장례 풍속을 따라 지신으로부터 땅을 사들인다는 뜻으로 만든 매지권(買地權)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한국에서 묘지가 흔하게 발견되기는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오석(烏石), 혹은 점판암계의 장방형 석판을 물갈이해서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조선시대가 되면 오석이나 점판암과 함께 자기로 된 도판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특히 흰색의 방탕에 청색으로 글씨를 쓴 청화백자계의 묘지가 많이 쓰였다. 고려시대의 묘지가 중국 묘지의 체제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면, 조선시대의 묘지는 재료, 형태, 내용 등에서 고려시대의 것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소판형(小板形)의 기본 틀에서 벗어난 조선시대의 묘지는 묘비모양, 단지모양, 원통형, 표주형(標柱形) 등 다양하다. 또한 장례의식 중 묘지를 안치하는 광정에서 다양한 면모가 엿보이기 때문에 묘지의 작성과 그것의 매납은 단순히 피장자의 이름이나 약력을 알린다는 것 이상의 관념이 있는 듯하다. 이 백자지석은 조선 선조(宣祖) 10년(1577)에 만들어진 이무강부인 최씨의 직사각판형 백자(白磁) 지석(誌石)이다. 외곽으로 사각형 선을, 그 안에는 세로롤 선을 가늘게 음각(陰刻)하고 선 사이로 글씨를 음각(陰刻)하였다. 1편의 뒤면에는 '江陵崔氏誌石', 2편 뒤면은 '崔'라는 글씨가 각각 음각되어 있다. 유색은 회청색으로, 시유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第一(오른쪽)
①崔氏江陵望族考諱壽嵣忠武
②衛祖諱世忠通訓大夫金溝縣
③令曾祖諱
[정의]
싸리로 독이나 항아리처럼 엮은 그릇.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오지그릇이 귀한 산간지방에서 많이 쓰인다. 아가리는 둥글며 바닥은 네모꼴 또는 둥근모양이다. 안쪽에는 틈을 메우기 위하여 쇠똥을 바른 다음(쇠똥)에는 섬유질이 많기 때문이다. 진흙을 덧바르거나 아예 보릿겨와 진흙의 반죽을 바르며 안팎으로 종이를 바르기도 한다. 채독에는 콩·감자·고구마와 같은 마른 곡식을 갈무리하는데, 보통 콩은 두 가마니쯤 들어가며 무게는 3㎏ 내외이다. 물에 젖지 않으면 10여년은 쓸 수 있다.
1201
신틀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공업(工業) 초고공(草藁工) 짚신틀(짚신틀)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2072 / 000
상세설명
[정의]
미투리나 짚신 따위를 삼을 때에 신날을 거는 틀. '신틀(강원도 도계)·짚틀·미틀(경상남도 영산)·짚신틀' 등으로 불린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보통 대여섯개의 구멍이 뚫린 두툼한 각목에, 기둥 같은 발을 박고 이 몸체에 두개의 누운 다리를 박기도 하고 또 여러 개의 구멍이 난 널판대기를 앉을깨 형태로 몸체에 박기도 하는 두가지 형태가 있다. 보통 짚신을 삼을 경우는 신날을 두개의 기둥에 걸고 중간을 모아 가는 새끼에 걸어서 허리띠에 찬다. 미투리의 경우는 세개의 기둥에 신날을 걸게 되므로 육날미투리라고도 한다. 신을 삼아 나가면서 끝이 날렵한 '신뻔장'으로 당겨서 조여가며 삼는다. 강원도 도계에서는 박달나무로 신틀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