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가옥의 지붕을 덮는 옥개용(屋蓋用)의 건축부재를 말한다.
[발달과정/역사]
기와는 양질의 점토를 재료로 모골(模骨) 및 와범(瓦範) 등의 제작틀을 사용하여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가마에서 높은 온도로 구워서 제작한다. 한국에 기와가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와당이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히 밝힐 수 없으나 한국에 기와가 들어온 시기는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조적에 맞게 구조가 변형되어, 이른바 한국적인 양식으로 발전을 보게 된 것은 3세기말 이후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시대 건물자리에서 비로소 와당이 발견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는 각 국의 특징이 있는 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궁궐 및 사찰의 건축 조영을 담당하는 관서(官暑)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에는 나라에서 쓰는 기와만을 전담하는 와박사(瓦博士)의 직제(職制)가 있었고, 백제 위덕왕 35년(588)에는 일본에 와박사를 파견할 정도로 발전되었다. 신라에는 특별히 와당만을 제조하는 와기전(瓦器典)이란 마을이 있었으며, 중국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이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高句麗唯王室及府佛~瓦」라 하여 "고구려는 왕실과 관부 또는 불사(佛寺)에 기와를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기와 지붕은 기본적으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 그리고 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암막새는 암키와로 형성된 기왓골의 끝에 막새부(드림새)를 접합시킨 기와를 말한다. 삼국통일 이후 유행하였으며, 수막새와 마찬가지고 그 시대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당초문(唐草文)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보상화문(寶相華文)을 비롯한 각종 동식물문양이 새겨져 있다. 문양은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당초문 등의 덩굴문양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619
귀면와(鬼面瓦)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귀면와(鬼面瓦)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887 / 000
상세설명
[정의]
도깨비 얼굴을 새겨 장식한 사래 끝에 붙이는 기와.
[개념]
귀면와(鬼面瓦)는 원래 수면(獸面)을 무섭게 의장화한 것으로 악귀의 침입을 방지하려는 벽사(辟邪)의 상징으로 목조 건물의 마루와 사래 끝에 장식한 것이다.
[역사]
귀면문의 기원은 중국의 은나라 이후 청동기의 문양으로 시문된 도철문(瑾隨文 : 두 개의 눈을 주체로 한 중국 고대의 기이한 무늬)에 있다. 그러나 귀면문이라는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형식이 성립된 시기는 한대(漢代)로 생각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도깨비기와라고도 한다. 나쁜 귀신을 쫓는 것은 영악한 귀신이라야 할 수 있다고 옛날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은 장승이 귀면(鬼面)인 것도 귀신에게 벽사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도깨비탈[鬼形面]을 문에 걸어서, 잡귀나 마마의 침범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사래 끝에 귀면와를 만들어 달았다. 아래는 넓고 위는 약간 좁으며, 둥근 방패 모양의 넓적한 기와 표면에는 눈·코·입을 중점적으로 강조해서 무서운 표정을 나타냈다. 눈썹 사이에 구멍을 뚫어서 사래 끝에 못을 박게 만들었다. 입에는 날카로운 어금니가 양쪽에 돋아 있고, 머리에는 뿔이 2개가 나 있다. 거친 수염과 머리카락이 더 무서워 보인다. 양쪽 옆과 윗면에는 넓은 주연대(周緣帶)가 튀어나와 있다. 거기에는 인동무늬·당초무늬·연주무늬 등이 조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옆면에도 당초무늬대를 돌렸다. 귀면의 조각은 깊이 패어 햇빛을 받은 면과 그늘진 면의 농담(濃淡)의 차이가 뚜렷하여 인상이 강렬하다. 신라시대의 귀면와 중에는 녹유(綠釉)를 입힌 것도 있다. 이 와당은 지붕 마루에 얹혀지는 도깨비 얼굴 기와로, 상단부가 결실되었다. 귀면은 비교적 험상궂게 두 눈이 융기되고 입 사이로 이빨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다. 양쪽 주연대(周緣帶)에는 주문(珠文)이 배열되어 있다.
618
보상화문전돌(寶相華文塼)
한국(韓國)
토제(土製) 기타(其他)
용도기능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벽/바닥재(벽/바닥재) 전(塼)
장르
기타(其他) 기타(其他)
유물번호
000886 / 000
상세설명
[정의]
점토를 틀에다 찍은 다음 건조시키거나 구운 벽돌.
[발달과정/역사]
중국에서는 은(殷)·주(周) 때에는 없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한 듯하다. 우리 나라 전을 시대별로 개관하면 삼국시대에 제작된 전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사용된 유구(遺構)의 원상이 보존된 예는 더욱 적다. 고구려의 영역 안에서 낙랑군시대의 전축분묘가 유행하여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수가 적지 않은데도 고구려에서는 전으로 고분 주체부를 축조한 일이 전혀 없다. 다만, 통구(通溝)지방의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는 돌더미 속에서 '願太王陵 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 안여산고여악)', '天秋萬歲永固(천추만세영고)', '保固乾坤相畢(보고건곤상필)' 등의 문자가 돋을새김된 전편이 발견된 일이 있는데 어떠한 형태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봉토의 일부에 사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고신라시대 전의 발견례는 더욱 적다.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가 전으로 작은 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물은 현존하지 않으며, 분묘는 고구려·백제와 달리 현실(玄室)을 마련하지 않은 원시적 구조로 전을 사용할 여지가 없다. 다만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의 일부에서는 무문전(無文塼)이 깔려 있는 유구가 발견된 일이 있다.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면 백제는 전을 사용한 예가 상당히 많다. 가장 뚜렷한 예는 공주 송산리에 있는 전축분 2기이다. 그 중 1기는 매지권(買地券)에 의하여 백제 무녕왕릉임이 밝혀져 매우 주목되었다. 송산리 제5호분에 사용된 전문에 대각사선을 그은 것과 사릉격문(斜稜格文)의 두 가지 기하문 (幾何文)은 중국 난징(南京)에서 발견된 육조시대(六朝時代) 남조(南朝)의 전 문양과 동일하며, 공주에서 출토된 전 중에 측면에 ‘梁良口爲師矣(양량구위사의)’라는 문자가 오목새김되어 있는 예와 아울러 중국 남조, 특히 양(梁)나라와 문화적인 연관이 깊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전의 사용 범위는 넓어지고 형태와 문양, 제작수법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8엽보상화문을 주문양으로 한 방형전이다. 신라시대에도 불교상을 조각한 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경주 사천왕사지에서는 벽을 장식하던 사천왕상전이 출토되어 크기, 각선의 예리함, 도상(圖像)의 특이함, 녹유(綠釉) 시유 등 7세기 후반의 신라 공예기술을 과시하고 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에는 전탑이 상당수 건립되었는데 그 중에는 문양전을 사용한 예가 있다. 고려시대에도 전은 여전히 사용되었으나 신라시대의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문양 등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에는 신라의 형식을 따른 보상화 또는 연화가 장식된 방형전 또는 녹유전이 간혹 발견되나 초기가 지나면서 대부분 벽전이고, 문양은 신라의 문양이 선적(線的)이어서 화사한 느낌을 주는 데 반하여 고려의 문양은 면을 넓게 살려서 조형감각에 차이가 있다. 때로는 문양의 배경에 횡선 또는 물결무늬를 촘촘히 쳐서 번잡스러운 느낌이 난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풍을 따라 문양전으로 축조한 탑이 1기가 남아 있는데, 경기도 여주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이 그것이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과 많이 달라졌지만, 반원연주문(半圓聯珠文) 안에 당초문을 장식한 문양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전은 빈약한 듯하면서도 특수한 것이
[정의]
삼국시대에 유행한 제사용 그릇으로 다리가 붙은 토기를 말하지만 주로 신라, 가야지역의 두형(豆形)토기를 칭한다.
[발달과정/역사]
굽다리접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선사시대 및 고대 용기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중국식 명칭으로는 '두(豆)'라고 하는데 주례(周禮)를 참조하면 나물 혹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며 제기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굽다리접시가 한 시기의 토기유물군 중에 주된 기종(器種)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초기철기시대부터이다. 무문토기 전기까지 올라가는 굽다리접시 중에는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만 발견되는 편이고 무문토기 중기까지도 주된 기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철기시대 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단계부터는 굽다리 접시가 점차 주기종(主器種)으로 정착하게 된다. 굽다리점시라는 기종이 가장 많이 제작되고 장기간 다양하게 발전한 지역은 신라와 가야지역이며,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보통 고고학자가 토기편년을 할 때에 형식편년의 지준으로 굽다리접시를 선택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굽다리접시의 기본형태를 보면 낮은 접시나 깊은 완(盌), 혹은 바리(鉢)와 같은 배신(杯身)에 원통형(圓筒形) 또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의 다리(臺脚)가 결합된 모습인데 다리를 장식하거나 아니면 그릇의 중량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굽구멍(透窓)을 뚫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굽다리접시는 다른 어떤 기종(器種)보다도 그릇뚜껑이 따로 제작되어 덮이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시기의 같은 유구에서도 뚜껑없는굽다리접시(無蓋高杯)가 있는가 하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도 함께 출토된다. 이 굽다리접시는 회청색의 경질소성으로 자연유가 흡착되어 있으나 박리(剝離)되었다. 굽다리는 나팔형태로 중간에 돌대(突帶)를 둘러 상·하단(上·下段)으로 구획하고 각각 3개의 굽구멍을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굽 밑부분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동체(胴體)는 벌어지면서 올라가 단을 이룬 뒤, 오르라들어 구연(口緣)을 형성한다. 뚜껑(蓋部)은 구연부(口緣部)가 외반하며 드림턱을 두었으며, 조금씩 오므라들어 꼭지부와 접합한다. 꼭지부는 단추모양을 하고 있는데 윗부분에 작은 꼭지가 튀어나와 있다.
[정의]
삼국시대에 유행한 제사용 그릇으로 다리가 붙은 토기를 말하지만 주로 신라, 가야지역의 두형(豆形)토기를 칭한다.
[발달과정/역사]
굽다리접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선사시대 및 고대 용기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중국식 명칭으로는 '두(豆)'라고 하는데 주례(周禮)를 참조하면 나물 혹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며 제기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굽다리접시가 한 시기의 토기유물군 중에 주된 기종(器種)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초기철기시대부터이다. 무문토기 전기까지 올라가는 굽다리접시 중에는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만 발견되는 편이고 무문토기 중기까지도 주된 기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철기시대 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단계부터는 굽다리 접시가 점차 주기종(主器種)으로 정착하게 된다. 굽다리점시라는 기종이 가장 많이 제작되고 장기간 다양하게 발전한 지역은 신라와 가야지역이며,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보통 고고학자가 토기편년을 할 때에 형식편년의 지준으로 굽다리접시를 선택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굽다리접시의 기본형태를 보면 낮은 접시나 깊은 완(盌), 혹은 바리(鉢)와 같은 배신(杯身)에 원통형(圓筒形) 또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의 다리(臺脚)가 결합된 모습인데 다리를 장식하거나 아니면 그릇의 중량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굽구멍(透窓)을 뚫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굽다리접시는 다른 어떤 기종(器種)보다도 그릇뚜껑이 따로 제작되어 덮이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시기의 같은 유구에서도 뚜껑없는굽다리접시(無蓋高杯)가 있는가 하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도 함께 출토된다. 이 굽다리잔은 뚜껑이 없는 무개고배(無蓋高杯)로서, 속이 깊은 반구형(半球形)의 접시에 구연(口緣)은 직립(直立)하며 구연단은 뾰족하게 처리하였다. 굽다리는 나팔모양으로 세 개의 장방형(長方形) 굽구멍(透孔)을 배치하였다. 회청색을 띠는 경질토기이며, 기면(器面)에 물레 성형 흔적이 남아 있다. 기형(器形)이 약간 이그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