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청유(靑釉)를 시유(施釉)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청자(靑磁)는 철분이 극소량 들어 있는 태토 위에 철분 1~3%의 장석유(長石釉)를 바르고 환원염으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한다. 대체로 환원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불순물이 함유되거나 해서 유색(釉色)이 황녹색이나 회녹색, 때로는 산화되어 황갈색을 띤 것도 청자로 부르고 있다. 다만 구리성분[銅分]의 산화에 의한 녹유(綠釉)는 청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중국 절강성 북부의 월주요(越州窯)에서는 한대부터 원시적인 청자가 만들어졌지만 5~6세기경부터는 차츰 발전하여 제작지도 화남·화북으로 퍼져나갔으며 당나라를 거쳐 송대에는 절정을 이루어 청자요가 중국 각지에 있었다. 특히 복건성, 절강성, 광동성의 해안지역에서 많은 요지가 발견되었고 청대의 경덕진료에서는 송·명대 청자의 모조품제작이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청자의 발생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 말부터 중국 월주요에서 만든 원시청자인 고월자(古越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학설과 10세기 후반에 고려의 중앙집권화 및 신지배층의 중국도자에 대한 수요에서 청자제작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불교사회와 귀족문화를 배경에 두고 있는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과 유려하고 당당한 선의 흐름을 지닌 형태, 그리고 독창적인 상감기법 및 문양을 특징으로 한다. 더욱이 고려 이전의 기명들이 대부분 의식용 그릇이었던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합(盒), 대접, 접시, 완(碗), 술잔, 병, 주전자 등과 같은 실용적인 그릇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장식용 그릇인 꽃병[화병], 연적(硯滴), 향로에는 오리, 원숭이, 사자, 혹은 참외나 석류 등의 동식물 모습을 표현했는데 매우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청자상감(象嵌)은 고려청자의 장식기법중 가장 두드러지고 대표적인 수법으로 문양을 음각하고 거기에 태토와 색깔이 다른 백토(白土), 자토(紫土)를 메우고 그 위에 청자유를 씌워 굽는 것이다. 이 청자병은 구부(口部)가 나팔처럼 벌어지고 좁아진 목에 어깨에서부터 벌어져 동부(胴部)가 풍만해졌다 좁혀진 병(甁)이다. 문양(文樣)은 동부(胴部) 전체를 두 줄씩 구획선으로 이등분하였다. 윗면에는 연판문대(蓮瓣文帶)를 주문양으로, 동부(胴部)에는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을 백상감(白象嵌)으로 율동감있게 시문하였다. 기면(器面)에 물레 성형 흔적과 타날(打捺)된 흔적이 남아있다.
609
함(函)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가구(家具) 함(函)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855 / 000
상세설명
[정의]
의류·패물 등을 넣어두는 나무상자.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혼인 때 신랑측에서 채단(采緞 : 치마저고리감)과 혼서지(婚書紙)를 넣어 신부측에 보내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함이나 궤류(櫃類)는 다종다양하고 미적으로도 뛰어나다. 안방용으로는 작은 보석함에서부터 실함·바느질함·혼함(婚函)과 의류를 보관하는 여러 형의 의궤(衣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며, 사랑방용으로는 연함(煙函)·인함(印函)·문서함·관모함(冠帽函)·관복함(冠服函) 등이 있다. 또한, 재료로 분류할 때는 오동함(梧桐函)·초각함(草角函)·죽장함(竹張函)·교피함(鮫皮函 : 말린 상어가죽함)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함과 궤를 엄밀히 구별한다면, 함은 소형상자로서 뚜껑이 위에 있거나 또는 그 후면에 경첩(세간의 문짝을 다는데 쓰는 쇳조각 장식)을 단 것이고, 궤는 함에 비하여 비교적 대형이며 문판(門板)이 앞면에 부착되거나 뚜껑을 위에서 씌우게 되어 있어 의류 및 귀중문서 등을 보관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함은 그 용도가 무엇이든 소형이므로 큰 가구 위에 올려놓고 장식을 겸한 수장구(收藏具)로 쓰기 때문에, 조형상 형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색채·문양·질감표현 등에 많은 기교를 나타내고 있다. 형태는 정방형 또는 장방형 등으로 단조로우나 전면 뚜껑과 몸체를 연이은 모서리까지 장식이 풍부하다. 자개·죽장·화각(華角)·교피·자수 등과 같이 재료의 화려함과 복잡한 문양이 시문된 것 외에는 특히 금구(金具) 장식이 많다. 즉, 면끼리 맞닿는 모서리는 흔히 맞짜임을 하거나 연귀맞짜임으로 짜는 게 보통인데, 함의 모서리에는 무쇠나 주석 등의 감잡이(합쳐서 못을 박는 쇳조각) 장식을 하여 더욱 구조적인 힘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뚜껑 앞에는 앞바탕장식, 귀퉁이에는 불로초나 당초문의 귀싸개장식이 있고, 환고리를 운치있게 달아놓는다. 또한, 큰 가구에서 볼 수 있는 마대(馬臺)의 축소된 운문(雲文)의 풍혈(風穴)장식은 매우 귀엽고 사랑스런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재료로는 가볍고 좀이 잘 안 먹는 오동나무나 결이 고운 소나무·은행나무·배나무가 많이 쓰이고, 내부에는 한지를 바르고, 겉에는 옷칠을 하여 늘 반들반들하게 광을 내어 썼다.
608
도리깨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산업/생업(産業/生業) 농업(農業) 수확탈곡(收穫脫穀) 도리깨(도리깨)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854 / 000
상세설명
[정의]
콩·보리 등 곡식을 두들겨서 알갱이를 떨어내는 데 쓰는 연장.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농사직설(農事直說)≫의 '고로(建吉:향명은 都里鞭)', ≪과농소초(課農小抄)≫와 〈월여농가(月餘農歌)〉의 '연가(連暇)', 〈농가월령가〉의 '도리(邏)', 그리고 ≪농정촬요(農政撮要)≫의 '도리편(兜里鞭)' 등은 모두 도리깨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도루깨(전라남도 영광)'·'돌깨(전라남도 거문도)'·'도깨'라고도 불린다. 기름한 작대기나 대나무 끝에 턱이 진 꼭지를 가로 박아 돌아가도록 하고, 그 꼭지 끝에 길이 1m쯤 되는 휘추리 서너 개를 나란히 잡아매었다. 자루를 공중에서 흔들면 이 나뭇가지들이 돌아간다. 휘추리로는 닥나무·윤유리나무·물푸레나무와 같이 단단한 나뭇가지를 쓰는데, 대가 많이 자라는 남부지방에서는 손잡이나 휘추리를 모두 대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물푸레나무의 경우, 휘추리를 만들기 위하여 낫으로 끊으면 사용할 때 끝이 터지므로 나무를 한 번 베어낸 다음 그 자리 바로 아래에서 새로 나오기 시작하여 두 해가 되는 가지로 만드는 것이 좋다. 이 때 힘센 사람이 한번에 확 잡아 떼어내야 한다. 단번에 떼어지지 않는 것은 일단 휘늘어졌기 때문에 탄력이 약해서 휘추리로 쓸 수 없다. 떼어낸 가지는 여러 개를 함께 묶어 두어야 휘어들지 않는다. 휘추리는 해마다 갈아 대야 한다. 쉽게 떨어지기도 하거니와 모양이 성하더라도 이들을 묶어 맨 칡이나 가죽끈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혼자도 도리깨질을 하지만 서너 사람이 마주서서 차례를 엇바꾸어 가며 떨기도 하는데, 이 때 한 사람이 소리를 해서 속도를 조정하는 동시에 노동의 괴로움을 덜기도 한다. 도리깨에는 ① 꼭지, ② 아들(휘추리), ③ 장부(손잡이), ④ 치마(휘추리를 잡아맨 끈) 등이 있으며, 이것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흔히 보리, 밀, 콩, 녹두, 팥 등의 타작에 쓴다.
607
뒤주
한국(韓國)
나무(나무)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저장운반(貯藏運搬) 뒤주(뒤주)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846 / 000
상세설명
[정의]
나무로 만든 곡식을 담는 궤(櫃).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통나무로 만들거나 널빤지를 짜서 만든다. 통나무로 만드는 것은 밑둥과 머리에 따로 널빤지를 대어 막고, 머리 부분의 한쪽을 열도록 문짝을 달아 낟알을 넣거나 퍼낸다. 널빤지를 짜서 만드는 뒤주는 네 기둥을 세우고 벽과 바닥을 널빤지로 마감하여 공간을 형성하고 머리에 천판(天板 : 천장을 이루는 널)을 설치한다. 천판은 두 짝으로 만들어 뒤편의 것은 붙박이로 하고 앞쪽으로 여닫는다. 여닫는 데는 쇠장석을 달아 자물쇠를 채운다. 또 네모반듯한 상자를 여러 개 만들어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이엉을 덮어 만든 것도 있다. 이 밖에 네 기둥을 세우는 뒤주의 서너배 크기로 만들어, 기둥의 앞면에 따로 기둥을 세워 문벽선을 삼고, 그 문벽선에 물홈을 파고 널빤지를 드린 것도 있다. 이런 거대한 뒤주는 동화사(桐華寺)의 요사채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것을 한층 더 크게, 곳간만하게 만들어 마당 한쪽에 세우고 지붕을 이어 비바람을 가리게 하거나, 집의 한 끝에 따로 한칸을 설치하고 정면에 빈지 드린 문얼굴을 만들어 완성하기도 한다. 이것도 곡식을 수장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뒤주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뒤주로는 버드나무 굵은 것이나 가는 싸리나무, 대나무오리를 써서 큰 독과 같은 형태로 엮은 것도 있다. 여기에 서까래를 걸고 이엉을 이어 초가처럼 꾸민다. 밑둥 한쪽에는 네모난 창을 내고 문을 닫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열어 낟알이 쏟아져 나오게 한다.
606
담뱃대
한국(韓國)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용도기능
주(住) 생활용품(生活用品) 신변잡구(身邊雜具) 기타(其他)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844 / 000
상세설명
[정의]
담배를 피우는 데 쓰이는 도구.
[역사]
한국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1618년경이고, 담뱃대는 대일무역의 창구구실을 하였던 동래(東萊)에서 일찍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명성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규합총서≫에서 동래연죽을 유명물산의 하나로 지목하였고, 〈춘향전〉에서도 "왜간죽 부산대에 담배를 너훌지게 담는다."는 구절이 보인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우리 나라의 옛 문헌에서는 연죽(煙竹)·연관(煙管)·연배(烟盃)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연죽이 일반적이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담배통은 대꼬바리·꼬불통, 물부리는 물추리·빨부리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또, 설대가 긴 것은 장죽(長竹),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短竹]라 부른다. 담배가 우리 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 흡연구는 필연적으로 담배 보급 이후에 수반되었을 것이다. 담배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는 역시 일본의 양식이 이식되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오래 된 양식의 담뱃대는 담배 담는 통이 작고 설대도 짧았다. 그러나 18세기 풍속도에 나오는 한국인의 담뱃대는 이미 장죽이 유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의하면 조관들이 담배합과 담뱃대를 말 뒤에 달고 다닌다고 하면서, 비천한 사람들은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서유구(徐有梏)는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서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통이나 오동(烏銅 : 검은빛이 나는 구리)으로 담뱃대를 만들뿐더러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쓸데없는 데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조선 말기의 담뱃대에 대한 사치풍조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전통공예로서의 담뱃대가 백통을 기본으로 하여 오동과 금은으로 시문(施文)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종래 담뱃대의 재료는 담배통의 경우 구리·놋쇠·백통을 쓰고 도자기로 된 것도 더러 썼으며, 물부리에 있어서는 쇠뿔·수정·호박·옥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또, 설대는 자죽(紫竹)·반죽(斑竹)을 즐겨 썼으며, 특히 장죽에 있어서는 각죽(刻竹) 및 낙죽(烙竹)으로 치장하는 기법이 성행하였다. 서구식의 파이프는 19세기 무렵 함경도지방에 보급되었는데, 이를 목연통(木煙筒)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