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식기를 받치는 작은 규모의 상.
[개설]
평평한 반면(盤面)의 통판 널과 여기에 연결되는 다리로 이루어진다. 반(盤) 아래에는 여러 가지 조각이나 문양으로 장식한 난간이 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리를 견고하게 하여 주는 중대(中帶)와 족대(足臺)가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동하기 편리한 소형 상이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 유교이념인 남녀유별·장유유서(長幼有序)의 사상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쓰였으며, 공간적으로도 부엌과 방이 멀고 규모가 작으면서 좌식생활(坐式生活)을 하는 한식 온돌방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형태·용도에 따라 60여종으로 분류되며 명칭과 구조가 다르다. 각 지역은 그 지방 특유의 수목과 생활양식에 따라 지방색을 띠며, 그중 특색이 두드러지는 것이 통영반(統營盤)·나주반(羅州盤)·해주반(海州盤)으로 제작·기교면에서 뛰어나다. 반면의 형태는 8각·12각·장방형·4방형·원형·반월형(半月形)·연엽형(蓮葉形)·화형(花形) 등으로 분류되며, 다리는 모양에 따라 구족반(狗足盤)·호족반(虎足盤)·죽절반(竹節盤)·단각반(單脚盤) 등으로 불린다. 경상도는 죽절형, 전라도는 호족형, 강원도·경기도는 구족형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쓰임새에 따라서는 식반(食盤)·주안반(酒案盤)·공고상(公故床)·제상(祭床)·교자상(交子床)·대궐반(大闕盤)·돌상[百玩盤]·약반(藥盤)·춘반(春盤)·과반(果盤) 등으로 나누어진다. 재료는 은행나무·호두나무·가래나무·오동나무·피나무·느티나무 등이 반면에 사용되었고, 다리에는 소나무·단풍나무·버드나무 등이 쓰였다. 표면의 칠은 생칠(生漆)·주칠(朱漆)·흑칠(黑漆)과 일반 식물성 기름칠을 하여 소반이 트거나 흠이 생기는 것을 막고 방수가 되게 하였다. 주칠은 혼례용과 궁중용으로 쓰였고, 흑칠은 제사에 사용되었다. 색깔은 황토분·석간주(石間蘚 : 산화철을 많이 포함한 붉은 빛의 흙)·치자 등으로 입히며, 좀더 진한 색을 내기 위해 먹물이나 검은 흙을 섞어 바르기도 하였다. 화려하게 자개를 박아 장식한 것도 있다. 이 소반은 나주반 형태의 소반이다. 다리는 대나무마디(竹節) 모양이며, 사각천판에 나비와 화형(花形)을 투조한 운각(雲刻)을 끼웠다. 운각 밑에는 중대(中帶)를 둘렀고 다리 사이는 족대(足臺)로 장식과 보강의 효과를 주었다.
554
동이
한국(韓國)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기타(其他)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763 / 000
상세설명
[정의]
떡이나 잔치음식 등을 담는데 사용한다. 또 무당들이 신당에 쌀을 올릴 때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바닥에서 아가리까지 약한 경사로 곧게 올려 세우고, 아가리를 외반시켜 전을 만들었다. 굽은 높고 곧게 뻗었으며 몸통에 손잡이를 2개 달았다.
553
청동숟가락(靑銅匙)
한국(韓國)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시(匙)
장르
민속품(民俗品) 민속품(民俗品)
유물번호
000754 / 000
상세설명
[정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 또는 상대방을 높이어 그의 숟가락을 이르는 말.
[발달과정/역사]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숟가락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초도패총에서 출토된 골제품(骨製品)이다. 중국에서는 서기전 10∼6세기경의 가요를 모은 ≪시경≫에 처음 기록이 나온다. 일본에서는 서기전 3세기경의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젓가락은 우리 나라에서는 공주무녕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도 춘추전국시대(서기전 403∼221년)에 비로소 기록이 나온다. 그러므로 젓가락은 숟가락에 비하여 늦게 발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에서 수저를 병용한 것은 삼국시대였다. 중국·일본에서도 시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저를 병용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일본에서는 점차 숟가락의 이용이 줄어들고 젓가락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는 관습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관습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병용하면서 식사하는 관습이 전통을 이루게 된 것은 우리 일상식의 내용이 국물음식과 국물이 없는 음식을 항상 병용하게끔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수저는 상고시대에는 주로 청동제품이었다. 이어서 놋쇠제품·백통제품·은제품으로 변천되었다. 형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고려 초기의 것은 숟가락의 자루가 크게 휘어졌다. 중기의 것은 자루 끝이 제비꼬리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숟가락자루의 제비꼬리가 없어지고 자루의 휨이 적어진다. 숟가락 면은 나뭇잎과 같은 타원형을 이룬다.
수저는 고려 중기 이후에는 숟가락자루가 길어지고 두꺼워지며 곧아진다. 숟가락 면은 둥글어진다. 젓가락은 한쪽이 점차 가늘어져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이루게 된다. 수저의 윗부분에는 장식으로 길한 의미의 글자나 꽃을 칠보로 입히는 경우가 많다.
수저의 사용은 숟가락이 주가 된다. 국물뿐만 아니라 밥도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정식이다. 숟가락을 손에 쥐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밥상에 놓지 말아야 한다. 젓가락을 쓸 때에는 숟가락을 밥그릇이나 국그릇에 걸쳐둔다. 젓가락을 쓰지 않을 때는 밥상에 눕혀두어도 좋다. 젓가락의 용도는 반찬을 집는 데에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어린이의 첫돌날에 아기의 개인용 수저를 준비하여 주는 풍습이 있다. 성장하면 연령에 맞추어 큰 것으로 바꾸어 주고 혼인할 때에 신부가 신랑·신부 두 사람의 수저를 밥그릇·대접과 함께 준비하여 거의 평생을 쓴다. 따라서 각기 개인용 수저가 있으며 접객용 수저는 따로 준비한다. 이와 같이 수저는 우리 식문화의 저변적 특성을 형성하는 한 요소이며,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의 식사용구이다. 이 숟가락은 청동(靑銅)으로 제작되었으며 시면(匙面)이 타원형으로 길고 손잡이 끝을 작은 보화형 시면으로 장식하였다.
[정의]
삼국시대에 유행한 제사용 그릇으로 다리가 붙은 토기를 말하지만 주로 신라, 가야지역의 두형(豆形)토기를 칭한다.
[발달과정/역사]
굽다리접시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일대의 선사시대 및 고대 용기문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릇의 한 종류이다. 중국식 명칭으로는 '두(豆)'라고 하는데 주례(周禮)를 참조하면 나물 혹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며 제기로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굽다리접시가 한 시기의 토기유물군 중에 주된 기종(器種)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초기철기시대부터이다. 무문토기 전기까지 올라가는 굽다리접시 중에는 한반도 동북지방에서만 발견되는 편이고 무문토기 중기까지도 주된 기종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기철기시대 즉,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단계부터는 굽다리 접시가 점차 주기종(主器種)으로 정착하게 된다. 굽다리점시라는 기종이 가장 많이 제작되고 장기간 다양하게 발전한 지역은 신라와 가야지역이며,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보통 고고학자가 토기편년을 할 때에 형식편년의 지준으로 굽다리접시를 선택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굽다리접시의 기본형태를 보면 낮은 접시나 깊은 완(盌), 혹은 바리(鉢)와 같은 배신(杯身)에 원통형(圓筒形) 또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의 다리(臺脚)가 결합된 모습인데 다리를 장식하거나 아니면 그릇의 중량을 가볍게 할 목적으로 삼각형 혹은 사각형의 굽구멍(透窓)을 뚫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굽다리접시는 다른 어떤 기종(器種)보다도 그릇뚜껑이 따로 제작되어 덮이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시기의 같은 유구에서도 뚜껑없는굽다리접시(無蓋高杯)가 있는가 하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도 함께 출토된다. 이 굽다리접시는 회청색의 경질토기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벌어지는 동체(胴體)를 지닌 이 굽다리 잔은, 동체(胴體)의 중간 위쪽에 각을 줌으로써 동체(胴體)의 상반부가 구연하도록 처리하였다. 굽다리는 나팔형으로 2조, 1조의 양간선대(陽刻線帶)를 둘러 3단을 구확하고, 맨 아래 구획 안을 제외한 두 구획 안에 네 개의 장방형(長方形) 투창(透窓)을 엇갈리게 배치하였다.
551
백자발(白磁鉢)
한국(韓國)
도자기(陶磁器) 백자(白磁)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발(鉢)
장르
고미술국학(古美術國學) 도자기(陶磁器)
유물번호
000752 / 000
상세설명
[정의]
순백색의 바탕흙[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
[발달과정/역사]
백자(白磁)는 규사[硅砂:석영]와 산화알루미늄을 주성분으로 한 정제된 고령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환원염 번조하여 유리질화된 순백의 반투명질 자기이다. 이와 같이 고화도로 구워 유리질화된 경질이 아닌 연질(軟質)백자는 이미 통일신라 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세기에는 초기 백자보다 퇴보하여 태토에 잡물이 섞이고 유약이 얇게 시유되며 태토와 유약이 밀착되지 않아서 유약이 떨어져 나간 예가 많다. 12,13세기에는 전대보다 조금 발전을 하였으나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기벽가 유약이 두텁고 표면이 단단한 경질백자를 제작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경질백자는 14세기 전반에 중국 경적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樞府)백자가 등장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며, 이는 경기도 안양시 관악산 기슭의 석수동 가마의 발굴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청자와 같은 시기인 신라말에서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나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하여 조선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 조선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절제된 선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기형들이 생겨나고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조선적인 특징을 지닌 것은 유교적인 생활태도에서 발달했던 제기(祭器)와 문방구이다. 백자의 종류는 아무 문양이 없는 순백자가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며, 이 순백자에 어떠한 안료로 문양을 나타내느내에 따라 백자청화, 백자철회, 백자동화(銅畵) 등으로 구분하며 넓은 의미로 보면 철채나 흑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순백자는 아무 문양도 없는 순백의 백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음각문양의 백자가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되면서 가장 많고 12세기에는 양각, 반양각과 투각, 상형기법 등의 백자가 발전하여 전북 부안의 유천리 가마에서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백자보다 청자의 생산이 압도적이었으며, 경질백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발전하여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으로 그중에도 순백자가 대부분이다. 이 백자발은 소문(素文)의 발이다. 구연(口緣)은 약간 외반되었고 구연에서 굽에 이르는 외측면선(外側面線)은 직선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내면 구연부 아래와 내저면 중앙에 각각 2줄 1줄의 음각선(陰刻線)이 둘러져 있다. 외면(外面)에는 물레질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유색(釉色)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백자유(白磁釉)가 시유되었다. 굽은 다리굽으로 굽다리 바닥에 유(釉)를 훑어낸 후 모래를 받치고 번조하였다.